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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절대적인 조건!

007 RAMBO 2020. 5. 1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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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의지가 필요합니다.

죄를 끊고자 하는 의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 등이
삶 가운데 동반되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의지가 동반돼야 할까요?

의지가 필요한 목적은 다른게 아닙니다.

의지는 바로
우리 중심의 온전함 여부를 표현하는
내적인 행동입니다.

즉, 내 중심이 세상(죄)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수단인 것입니다.

죄를 끊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된다는 것은
그 의지 자체가 죄를 끊게 만드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죄에서 나를 건지실 수 있다는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주님앞에 나아가
내 중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끊어낼 수 있도록
친히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받고..
그 긍휼에 의한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가 임하는 원천인 하나님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전제는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긍휼하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계속 이어져야 하는 삶의 여정 속에선 반드시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안에 거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과 로마서 9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사람이 긍휼함을 받을만한 사람일 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긍휼에 의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이 온전할 때
그 사람은 긍휼하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사 세상 가운데 반복해서 넘어지더라도
긍휼하심을 입기 때문에

주님앞에 나아가
변함없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에 의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그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중심이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넘어지고 또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별을 자기 의지로 발현시켜서
주님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경우
보통 인간적인 생각으론..

하나님앞에 나아가더라도
하나님이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심으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이건 우리가 그리는 모습이고..

실제로는
스스로 넘어졌음에도
그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상한 심령 붙들고 주님앞에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마음 상태가 불신자와 다르지 않음.)

즉 죄로 인한 심령 자체가 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죄를 자기 기준으로 합리화 해버리거나
스스로 큰 죄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에
심령이 상하고 통회하는 과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죄를 죄로 여길줄 아는 상한 심령이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그런데..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갔더니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받아주지 않으셨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죄를 정당화하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마음
즉, “죄 짓고 회개하면 되지”라는식의
간교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등..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자리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게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그리는 그림에
하나님을 끼워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단단히 붙들고 주님앞에 나아갔음에도
자기가 그리던 상황이 연출되지 않고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면..

주님앞에 변함없는 중심으로 다시 나아가고..

두번째도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면..
주님앞에 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과정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타이밍에 친히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한번(또는 두번) 주님앞에 나아갔더니
아무런 감흥(?)도 없고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 같더라며..
자기 생각으로 쉽게 판단하고 결론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생각하는 그 타이밍에
이러이렇게 무조건 역사해주셔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 내 기준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은혜를 주실 때도
당신이 정하신 타이밍에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로 인해..
또는 어떤 고통스런 상황으로 심령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힘겨운 마음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돌아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바로 서 있는 사람이
넘어져서 힘겨워 하는데 그 상한 마음 붙들고
주님 보좌앞에 나아가는 일이 쉬운 일일까요?

히브리서 4장 16절을 보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쉽게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싸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을 지키거나 빼앗는 싸움이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잠 4:23)

마음을 빼앗는 자는 누구인가요?
바로 원수마귀입니다.
(마 13:19)

우리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서 있다고 하면..

원수 역시
우리 중심의 상태를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도
하나님이 너를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간교한 거짓말로 속여서
하나님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긍휼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 긍휼에 의한 은혜를 얻기 위해
주님앞에 나아가려는 담대한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의지 자체가
영적인 정결함을 만드는게 아닙니다.

내 중심에 대한 표현을
의지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임하여
우리가 죄를 끊고 정결한 삶을 살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종종..

사람은 원래 죄인이고 나약한 존재니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같은 건 필요 없고
그져 기도하기만 하면..

주님이 알아서 죄릘 끊게 해주시고
거룩한 길로 이끌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런 경우는 앞서 말한..
힘겨운 마음 붙들고 주님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는 상한 마음으로
담대히 주님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마음도 없이
이러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하는
교리적 메뉴얼대로 행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계속 그 죄를 짓게 만드는
육적인 상황이나 환경 속에 있으면서
죄를 짓지 않길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죄안에 여전히 거하려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거나
아예 분별력이 결여된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죄를 끊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죄성이 표출되게 만드는
현실적인 상황과 환경의 변화를 이끄는
의지가 동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안 짓기 위해
죄를 지을만한 환경적 요인을 제거하는
의지나 노력은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본질(영)적인 부분,
즉 우리의 중심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중심에 근거한
나의 다른 존재영역인 혼과 육이
진리안에 합당하게 움직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로는 "중심, 중심"을 강조하지만..

실제적인 삶 가운데는
나의 모든 존재영역인 영혼육이
진리에 합당하게 유기적으로
반응하는게 아니라면..

실상은 중심을 핑계삼아
나의 게으름이나 죄성, 부족한 의지력을
정당화하려고 명분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원래 죄인이니까..
원래 나약한 존재니까...
원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이런 자기연민이 동반된
욕구나 기질을 교묘하게 합리화하면서
실상은 그 방향이 주님을 향한게 아니라
세상을 향하고.. 죄를 향하고..
자기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완전합니다"라는
입술의 그럴듯한 고백은 하면서..

인간은 원래 죄인이니
매일매일 넘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정당화하고..

그 어떤 의지도 발동하지 않은 채
조금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챗바퀴같은 삶을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의지나 노력 자체가
죄를 끊게 만드는게 아닙니다.

의지나 노력 자체가
정결한 삶을 살게 해주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의지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실 때
그 중심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과
그 중심에 근거한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행위(의지)가 뒷받침될 때..

또 실제 삶 가운데
그런 중심이 드러나는 행함(노력)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 중심의 진정성을 감찰하시고
죄를 끊고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친히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나의 나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입술로 고백한다면..

내 중심을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삶에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지은 후..
"인간은 원래 죄인이니까 죄 지을 수밖에 없지..”
라는 마음을 품은 사람과..

“주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내가 이 죄로 인해 넘어져 있을 순 없어!!”
라는 마음을 품는 사람의 차이는..

실제 삶에서
중심의 의지가 발현되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그 죄가 너무나 가증하고 싫기 때문에..

그런 중심이 의지적으로 발현되고
그럴수록 주님의 은혜가 더하여져서
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중심의 의지를 드러낼 의향이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죄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원래 죄인"이라는
자기합리화를 방패막이 삼습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는 사람 가운데
넘어지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죄와 싸우고 죄를 멀리하며

죄를 끊겠단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전적으로 믿으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반면 당연히 넘어질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진 후에도 "그래, 인간은 죄인이니까,
하나님이 그런 죄인을 구원해주셨잖아..."라고 하며
회개의 가치를 싸구려로 만들어 버립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보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안에 충만히 거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받으며 사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 중심이..
죄가 아닌 하나님께로 향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 또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해도,
어떻게든 그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중심의 방향이
실제적인 삶 가운데 의지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죄가 결코 나를 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은혜안에 거하도록 역사해주시기에
죄가 임할수록 은혜가 더욱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긍휼하심과 은혜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이 말세지말의 때에 진짜 승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 엘샤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