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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이유!

007 RAMBO 2020. 5. 1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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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과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 23:25-2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 11:39-41)

 

겉모냥은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있지만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찬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안을 깨끗이 해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진다"

 

"안을 깨끗이 하고 겉도 깨끗하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을 깨끗이 하면 겉은 알아서 저절로 깨끗해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안을 깨끗이 하는 것이 본질이고

겉을 깨끗이 하는 것은

본질에 귀속되는 비본질에 해당하기에..

 

안을 깨끗이 하면

겉은 자연스레 깨끗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안(중심)이 깨끗하다면,

겉(행위)은 그 깨끗한 중심에 의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 나오든

깨끗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시는 겉(행위)의 모양은

얼마든 우리가 생각하는 외적인 모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마음)이 본질인 것이고..

 

그 중심이 하나님앞에 온전하면

그에 따른 외적인 열매(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행위로

자연스레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게 아닌 우리의 중심(마음)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과

로마서 2장 6절,

계시록 20장 12절 등

성경 곳곳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대로

갚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들을 또 잘못 해석하게 되면

행한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함 자체를

본질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진짜 행함은...

 

중심이 온전할 때

그 중심에서 나오는 하나님 뜻대로의 행함,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행함이 되기에

그 행함대로 갚으신다는 것이고..

 

반대로 중심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그 온전치 못한 중심에서 나오는

행위를 통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게 아니고

표면적인 행함 자체가 본질이 되어야 한다면..

 

어떤 행함을 해야

하나님이 상주시고 당신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수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서로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내적인 차원이 아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 성경을 몇장씩 꼭 봐야 하고,

기도를 몇시간 해야 하고,

예배는 일주일에 몇번은 꼭 참석해야 하고..

헌금은 얼마씩 꼭 내야 하고..

구제와 봉사는 이러이렇게 해야 하고 등등..

 

하지만 성경은

이런 부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외적인 행함을

본질로 여기면서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만을 하십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이후의

시대에만 적용되는게 아닙니다.

 

표면적인 행위들을

지켜야 할 율법으로 규정하셨던

구약 당시에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삼상 15:22)

 

또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시 51:17)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는 진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행위들을 직접 규정하심으로

언약 맺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도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중심)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나님 음성에 청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신 10:12)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께서 무엇을 본질로 여기시는지를

직접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만약 하나님께서 외적인 행함을 본질로 여기셨다면

사울은 결코 버림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100% 순종하진 않았더라도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린다는 명분으로

튼실한 소와 양을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삼상 15:21)

 

하지만 하나님은 외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 변질된 중심을 본질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가 외적으로

어떤 대단해보이는 행위를 했더라도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4:5절에 보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외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경건하다'는 말은

어떤 외적 행위로 인해 드러나는

종교적 이미지를 의미합니다.

 

즉 "표면적인 행위"가 없어서

"경건하지 않게 보이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말씀에는 크게 두 가지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번째 포인트는

인본적 기준의 그런 외적 행함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중심'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중심이 본질이 아니라,

표면적 행위가 본질이라고 한다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심이 온전하지 않아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러나 구약 당시의 말씀도 살펴봤지만

내면(중심)보다 외형을 더 중요시하는

그런 의미의 구절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사람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외적인 부분에 치중하기 때문에..

 

그런 기준을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내면(중심)을

본질로 여기시고..

 

온전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기준에 합당한 외적인 열매는

어떤식으로든 나오기 때문에..

 

사람의 기준에선

전혀 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경건치 않게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을 의롭다 여기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포인트는

그런 인본적 기준에 매이지 않고,

영적인 기준, 즉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믿는 것을

의로운 행위로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이 아니고..

 

사람의 기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며

그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안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사고 흐름들을..

 

하나님은 행함으로 여겨주시고

그런 행함이 하나님앞에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말씀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생물학적으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다는게

분명한 현실이었지만..

 

그런 인본적 생각과 기준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믿는다는 이들의 경우는..

 

외적인 행위(현상)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준으로 분별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은

매우 적다는게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만큼 내 눈에 보여지고 귀로 들려지면서

우리의 사고를 인본적 기준으로 바꿔치려는

많은 내적요소(자기 생각, 종교 교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책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읽고 이해한다고는 하나

그 말씀을 실제 삶에

면밀하게 적용시키는 일은 드뭅니다.

 

설사 적용시킨다 해도,

내 입맛에 맞게

적용시키고픈 것들(위로, 축복 관련)만

골라 적용시키려는 습성이 여전히

우리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 따라

다른 심판의 기준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고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따라 다릅니다.

(마 25:14-30, 눅 19:11-27)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는

그 절대진리의 공식을 빼곤

다른 믿음의 공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겐 이 정도는

하나님께 전혀 책망받는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일이

하나님께 큰 책망을 받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보면,

자기 생활비 전부인 두렙 돈을 헌금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넣었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9장에서..

어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한 부자 청년은

이런저런 많은 계명들을 지켰지만..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영생을 얻을거라 말씀하시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반면,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고

속여 빼앗은게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말씀하십니다.

 

왜 삭개오는 소유 절반만 내놓아도 칭찬하셨고,

부자 청년에겐 소유를 다 팔라고 하셨을까요?

 

부자 청년의 중심은 자기 재물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계명들은 다 지키었지만

차마 자기 재물만큼은 선뜻 내놓지 못하는

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의로운 행위들이 아무리 많았더라도..

 

그가 내놓지 못한 제물, 거기에

그 사람의 실제 중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앞에 결코

의로운 판결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걸 아시고 그 청년에게

영생을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너의 중심을

행함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기 재물을 내놓겠다 고백하면서

자기 중심이 결코 재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주님께 먼저 증명해 보였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중심이 어떠한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중심에서 비롯되는 행함의

모양과 정도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구원에 이르는 행함이 되는 것이고,

누군가에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루 한끼 라면 사먹을 돈 천원이

자기가 가진 전부인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그 돈을

감사한 마음으로 헌금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겠지만..

 

수억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자기 지갑에서 만원짜리 겨우 꺼내서 헌금한다면..

 

그 사람은 그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겸비함으로 회개치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몇 %를 헌금했는지

행위 자체의 어떠함을 떠나서..

 

그 사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게 아니라..

자기 재산, 즉 땅의 것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심판하시는 기준이고

중심에 의해 나오는 열매(행함)를 감찰하신 후

그 행한대로 갚아주겠다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 16:27, 롬 2:6, 계 20:12)

 

만약 하나님이 달아보시는

그 중심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져 속해 있는 교회의 교리적 메뉴얼대로

종교적 행함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주님이 책망하신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로마서 10:2-3절이 주는 교훈을

우리 각자에게 적용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서두엔 분명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딴에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고

외적인 행위에 열을 올렸지만..

 

올바른 지식,

즉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기 의로 행동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훗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의 말씀처럼

주여 주여 하면서 항변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3)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불법의 행함은

외적으론 선해보이는 행함처럼 보였더라도,

하나님 뜻대로 행하지 않은 모든 행함을 의미합니다.

(마 7:22-23)

 

그래서 사람 기준의 행함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헤아리고,

그 뜻안에서 온전한 중심으로 살고 있는지..

그런 나의 행함이 그 중심에서 비롯된 행함인지..

 

자기자신을 겸비함으로 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내가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로 여겨지는가를

자각하고 날마다 스스로를 점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중심에서 나오는 행위대로

갚아주시고 또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절대불변의

진리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열왕기상 8:39)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베드로전서 1:17)

 

 

- 엘샤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