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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특별한 무엇이 있다

007 RAMBO 2014. 6. 29. 21:31

성경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고,

다른 부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다.

 

, 그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사항이라고 체념하는 사람도 있고,

지극한 노력과 희생적인 신앙행위로 이를 얻어내려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이라면 후자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기도회에 어김없이 참석하고,

교회에서 정한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참여하며,

담임목사의 권유라면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해서

각종 봉사와 전도, 분에 넘치는 헌금에다,

하나님의 뜻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지키려고 애를 쓴다.

 

그런 당신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그래서 뭐, 나아진 게 있습니까?”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류였고

가인은 버림받은 쪽이었다.

 

야곱도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의 형 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고

끔찍하게 이 땅을 떠나갔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 당신은 훤히 알고 계실 것이다.

설교 때마다 자주 오르는 주제이기에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성경의 위인들을 꼼꼼하게 분석해보면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연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이게 했나 궁금해졌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가장 큰 동력은 간절함이다.

간절함을 다른 말로 바꾸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일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나 형식적인 종교행사를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깊은 속내나 동기, 목적을 살피신다.

 

그래서 당신이 드리는 신앙행위에 간절함이 빠져있다면 시간낭비일 것이다.

간절함이 배어 나와야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 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던 가난한 과부나,

예수님으로부터 개로 비하되는 치욕적인 인종차별을 당했던 수로보니게 여인,

지붕을 뜯고 예수님 앞으로 병자를 내린 중풍병자의 친구들,

사도들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더욱 큰소리로 호소했던 맹인 등의 공통점은 간절함이다.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역경과 지난한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들에 비해 지금껏 당신이 드린 예배의식이나 기도, 봉사, 헌금 등의

희생적인 신앙행위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열매가 없었다면

간절함이 배어 나왔는지 살펴볼 일이다.

 

하나님은 간절한 마음이 없는 신앙행위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부자와 세리가 기도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간절함이 빠진 신앙행위는 단팥이 없는 찐빵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순종이다.

순종이란 자신의 생각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순종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들은 이유는,

어떤 명령에도 군소리 하나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사울과 다윗의 처지가 갈린 것도 순종했느냐, 아니냐에 있었다.

 

이 대목은 목회자들이 은밀하게 숨겨진 목적(?)을 가지고 즐겨 애용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염연히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잘 모르기에,

목회자의 말이 곧 하나님의 명령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어쨌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신앙행위는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의식이나 십일조헌금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그분을 찾아가는 행위이다.

 

다른 신앙행위들을 열심히 해도 순종하는 마음에 소홀히 한다면,

학교에 결석이나 지각 한 번 않고 성실하게 다녔지만 공부하지 않는 학생과 같다.

학교에 성실하게 다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자신을 항상 찾아오는 자녀를 최고로 기쁘게 여기신다.

그러나 성경은 책상 위에 먼지가 풀풀 앉은 채 낮잠을 자고,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우습게 여기는 크리스천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만나주지 않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예를 들어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끝내 말을 듣지 않았고,

둘째아들은 거절하였지만 다시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였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적지 않게 나온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시행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얻지 못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이 주제도 설교에서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소원하는 기도목록이나 바라는 대로 환경이 열리면 감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감사는커녕 불평과 불만이 쌓인다.

 

가장 이슈가 되는 게 돈에 관련된 소망이다.

자신이 소원하는 재정상태, 사업이나 투자의 성공, 악성부채의 해결,

직장에서의 승진 등이 모두 재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만 요청하라고 하셨다.

일용할 양식은 최소한의 생계비를 말한다.

 

그러나 당신이 소원하는 재산의 규모와 하나님의 뜻은 격차가 너무 난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지도 않고 감사할 수도 없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지만 욕심이 가득 찬 우리 마음에 그런 쩨쩨한(?) 말씀이 들어올 리가 없다.

감사란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나오는 게 아니다.

지금 당신이 처해있는 열악한 상황과 불편한 처지에도 감사가 나와야 한다.

 

그 감사의 잣대는 자신이 바라는 소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가 나오려면

많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인내를 기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감사가 나온다면,

그 다음부터는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면 당신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소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1평짜리 임대아파트에 살아도 고마워하며

15년 묵은 낡은 차가 굴러가기만 해도 감사가 나온다.

그리고 오늘 먹을 양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크리스천이 그런 감사가 없다.

아니, 그런 감사를 찾을 생각도차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길조차 잃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조건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애를 맡기고 사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에도 맡기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이 인생을 책임지기를 원하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를 바란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나간다면

최상의 결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주제의 설교를 들을 때면

 아멘이라는 소리가 힘차게 나오는 이유이다.

 

그러나 맡기는 증거가 무엇인가?

크고 작은 인생의 기로에서 기도하지만,

결국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뜻대로 결정하며 살지 않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부자 할아버지가 아니다.

마치 알라딘의 램프를 문지르면 펑하고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충직한 하인으로 기대하며 기도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불경한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며 살지 않는다면

결과는 오십보 백보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까닭은 당신이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살다가 종국에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들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며 관여하시도 않는다.

당신이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심히 하든,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맡겼다면

일상의 삶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늘 찾아야 하며,

쉼 없는 기도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신뢰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면 된다.

 

모세는 40세에 광야로 나가서 인생의 황혼인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요셉도 16세에 노예로 팔려 캄캄한 지하 감옥에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끔찍한 환경에 놓인 채,

무려 10년을 넘게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30세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나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는가?

아직도 모른다면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기 않았다는 표시이고,

그분께 인생을 의탁하였다면 기도하면서 기다리면 된다.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을 고되게 훈련시키는 목적은,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다.

 

조급해하고 불평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께 당신의 인생을 맡기지 않아서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하다.

 

하나님은 험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자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