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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잃어버린 기도는 허접하다

007 RAMBO 2014. 5. 30. 04:42

이솝 우화에 코끼리를 만졌던 맹인들의 이야기를 아실 것이다.

다리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가 기둥처럼 생겼다고 말했고,

배를 만진 맹인은 벽처럼 생겼다고 말했으며,

코를 만진 맹인은 뱀처럼 생겼다고 말했으니,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일이 교회에도 적지 않다.

기도에 대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수단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그러한 생각도 성경에 전혀 근거 없는 것도 아니며

목회자나 신앙선배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것들이다.

말하자면 관행적인 신앙의 유산인 셈이다.

 

그러나 신앙의 근거가 성경에서 밝힌 하나님의 뜻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허망한 결과를 받아 들게 뻔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적인 수단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그게 바로 기도와 말씀이다.

 

말씀을 머리에 담아두는 성경지식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슴으로 깨닫는 현상은 성경을 읽을 때 잔잔한 감동이 오며,

너무나 쫀득쫀득해서 한 구절을 읽고 그 뜻을 음미하느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성경이 그냥 성경위인들의 일대기나 하나님의 사건을 서술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씀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상태는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며,

이 역시 성령이 내주하시는 기도를 통해서야

비로소 성경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뵐 수 있으니,

기도 없이는 성경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나님을 감동시켜 우리가 소원하는 능력을 얻고

형통한 삶을 영위하며 천국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일까?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입만 열면 기도를 외치는 교회에서도

이러한 고민을 하지 않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반적으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희생적인 기도를 가장 먼저 꼽을 것이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일천번제 기도에 참석하며,

기도원에 금식기도를 하러 떠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러한 발상은 성경적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새벽기도회의 참석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고,

일천번제 기도회가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를 하기 전에 전심으로 기도하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자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보여주려고 애쓰지만

성경에는 그러한 기도방식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망한 기도를 하다가

아무런 응답이 없어 중도에 포기하곤 했던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반복하기 일쑤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첫 번째 요소가 태도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하려면 마음과 영혼을 다해서(4:29),

전심으로, 간절히(2:42) 하라고 하셨다.

 

그렇기에 기도시간에 몸부림을 치는 기도,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전심으로 하지 않고 있다면

일찌감치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응답이 없는 기도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대충하는 기도, 형식적으로 입만 달싹거리는 기도,

잡념에 휩싸여 시간만 때우는 기도라면 자기만족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다음 요소는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여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를 시작하기 무섭게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목록을 외치기 일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사귐이 있는 기도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구절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상태를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말은

나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15:7) 상태도 이와 같다.

예수님과 내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생략하고

오직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록만을 주구장창 외치고 있으니

이 무슨 생떼인가?

 

이는 필시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음식을 배달해주는 웨이터쯤으로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중 첫 번째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행위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찾아야 한다.(8:17)

 그것도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간절히 불러야 한다.(29:13)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11:6)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시며 기뻐하신다.

주기도문의 시작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가 내안에 오실 때까지 간절히, 전심으로 반복해서 불러야한다.

또한 찬양하는 기도를 기뻐하신다.

 

계시록에 보면 이십사 장로와 스랍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가르치듯이 말이다.

우리의 기도내용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할렐루야의 찬양을 수도 없이 불러야한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예배가 된다.

예배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회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목록이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은 죄 있는 백성들의 마땅한 고백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회개가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또한 감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목록에서 빠질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감사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십자가의 보혈의 묵상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요소이다.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죄악의 재앙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천국의 자격이 얻어졌다면 기쁨과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본질적인 기도며

하나님과 깊게 사귀는 교제의 기도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기도훈련을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주할 때까지

오직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찬양과 감사, 회개 기도만 주문한다.

 

물론 적지 않은 시간과 과정을 거치지만,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가 성숙되면

틀림없이 기도가 깊이 몰입되며 성령이 내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령이 내주하여 기도가 몰입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간구와 중보기도를 하여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의 표징으로, 응답이 오고 문제가 해결되며

기적을 경험하는 능력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기도는 성령과 깊게 교제하는 기도여야 하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네 교회는 본질적인 기도가 아니라

관행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도로 시간을 때우고 있기에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