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화초를 가꾸는 마음

007 RAMBO 2019. 7. 13. 07:04

찬 바람에 뒹구는 낙엽과 함께 가냘프게 서있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늦가을의 싸늘함을 더욱 깊이 느낀다.

거기에다 빽빽히 들어선 회백색의 아파트 속을 오고 가려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차가워진다.


이럴 때에는 따뜻한 햇볕이, 싱그러운 푸르름이 이내 그리워진다.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푸르른 화초가 우리를 반겨준다면

그 움추렸던 몸과 마음은 금새 펴지고 말 것 같은 꿈을 가진다.


차갑고 싸늘한 날이면 푸르른 화초는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화초는 단지 물과 토양분만을 먹고 자라지는 않는다.

생명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물과 같이 부어져야 한다.


화초는 그 사랑과 정성을 먹고 산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화초 속에 깃들여 있는

사랑과 생명을 보며 반가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초를 가꾸고 지켜 보는 마음이다.


입원하고 있던 한 가정 주부가 외출을 요청했다.

“선생님. 잠깐 집에 갔다 왔으면 해요.

어젯밤에 무서운 꿈을 꾸었어요.

우리 집 화초가 다 말라 죽는 꿈이었어요.

지금까지 화초를 말려 죽인 적이 없었어요.

아무리 병든 화초도 제 손에 오면 척척 살아 났어요.


화초는 사람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물을 주고 정성과 사랑을 주면 반드시 살아나요.

그런데 어떻게 화초가 다 죽죠?

꿈인 줄 알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집에 가서 화초를 한번 보고 와야겠어요.”


외출하여 확인한 결과 화초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주부는 여전히 그 꿈을 불안해 하고 있었다.

너무도 사랑하던 화초였기에 그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정신치료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화초 속에 숨은

환자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찾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막내였던 환자는 국민학교 때 무척 사랑하고 따르던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운지라 주위에서는 모두 대학보다는 직장을 가질 것을 권했지만,

환자는 큰 언니 집에 거하며 거의 혼자 힘으로 대학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갖게 되었다.

남편도 좋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있었다.


이 주부에게 상처라면 사랑하였던 부모가 성장기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막내라고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던 부모가 안 계시

감정적으로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외로움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가고 싶은 대학을 아무도 가라고 권하거나

원해주지 않자 부모가 더욱 그리워졌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아무도 나를 돌보아 주려 하지 않는구나.

이제 나는 나밖에 돌볼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을 더욱 굳게 지키며 살아왔다.


그녀에게 '화초 가꾸기’는 바로 이러한 자신에 대한 마음에서 출발되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고 보호해 줄 사람이 없으니

내가 나를 가꾸고 사랑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절박했던 마음이 그 화초 속에 전이된 것이다.

그 화초의 생명이 곧 나 자신이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가꾸듯이

화초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가꾸고 사랑해 온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숨겨진 마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과거 상처를 생각하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어려웠지만 좋은 대학을 나왔고, 훌륭한 남편과 자식이 있다.


비록 과거의 상처는 컸을지 모르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해 주는 남편과 가정이 있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아직까지 과거의 상처 속에 머물고 있을까?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부모의 상실이란 사랑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었던 부모가 돌아가심으로 이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었던 만큼 상처도 컸다.

다시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모에 가까운 언니와 형부를 믿으려고 했지만,

부모와 같지 않은 것을 보고는 곧장 그 믿음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다들 하는 결혼이라 하였지만 사랑을 원하는 남편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맡기고 사랑하지 못하였다.

가정주부로, 부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완벽하게 해내었지만

진정 마음은 갇혀져 있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믿고 싶어도 과거의 상처가 너무나 크고,

다시 그 남편의 사랑과 믿음이 깨어질까봐 사랑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이러한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화초를 찾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몇 번이고 말했다.

"화초는 거짓말 하지 않아요.”

곧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화초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화초를 가꾸는 마음은 생명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혹시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속에 우리의 외로움과 사랑의 두려움을 감추고,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놓지 못하는 불신의 마음이 숨어 있다면

그 화초의 생명은 무척 외로워 보인다.


나만이 즐기는 화초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 진정 사랑하며

그 생명을 즐기고 아끼는 우리 속의 화초였으면 한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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