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마음과 신앙

007 RAMBO 2019. 4. 29. 12:03

우리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척 궁금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정신과 진료를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이 정신과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을 본다.


그러나 막상 진료를 권하면 달갑지 않게 여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내 마음을 보여야 하고

정신과 의사가 내 마음을 들여다 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리고 남들이 자기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자기의 마음은 자기만이 알기를 원한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도 자기의 마음을 모를 때가 있다.

사실 남 뿐만이 아니라 의식하는 자기까지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록 꽁꽁 감추어두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감추고 사는지를

다음의 한 예에서 찾아보자.


K씨는 이십 대에 큰 자본도 없이 작은 사업을 시작하였다가

지금은 몇 개의 사업체를 거느릴 정도로 성공한 유망한 사십 대의 젊은 실업가이다.

그런데 어느날 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심한 불안감,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

이른바 ‘공황(Panic)장애’란 병이었다.


최근에 사업을 확장하면서 은행 융자 등으로 자금 압박을 받고는 있지만

회사가 기울 정도는 아니고 확장을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전 같이 열심히 뛰어다니면 이 정도는 해낼 수 있는데도

요즘은 확장을 하기 위해 큰 돈을 얻어쓰는 것이 무척 겁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다고 하며 그 외에는 걱정되는 일은 없다고 했다.


K씨는 모두가 부러워 할 만큼 성공한 사람이다.

대인관계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금까지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왔다.

그런데 왜 이 사람에게 공황장애란 병이 갑자기 찾아왔을까?

도대체 이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길래

갑자기 그 마음속에서 공포심이 솟구쳐나왔을까?


본인도 이를 무척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치료를 받아볼 것을 제의했다.

자신이 지금 느끼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어떤 것들과

이러한 증상이 관계가 있을지 모르니 상담을 통해 이를 찾아보자고 했다.

K씨는 이에 동의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K씨는 삼형제중 둘째였다.

2대 독자였던 아버지는 장남에 대한 편애가 몹시 심했다.

막내는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았지만 K씨만은 아버지를 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형은 조금만 잘해도 칭찬을 해주고 자기는 공부를 형보다 잘해도 인정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늘 형보다 뭐든지 잘 하려고 열심히 했다.

공부도, 운동도,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둑도 모두 형보다 잘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해서 뭐든지 하면 악착같이 이기고,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끝내야 직성이 풀렸다.


한번은 형과 싸우다가 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형한테 대든다고 K씨는 크게 혼났고, 이후로는 아버지를 대하기가

더욱 어려워져 말도 제대로 못하고 피해다니고 싶었다.

어쨌든 이런 성격 덕분에 K씨는 실업가로 성공하게 되었고,

지금은 형보다 훨씬 잘 살고 있다.


그렇다면 K씨는 과연 그 마음 속에 무엇이 있었으며

이를 어떻게 감추며 살아왔을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열등감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항상 느끼고 인정한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이를 감추며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은 항상 완벽하게 되도록 노력해야만 하고

조금이라도 헛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열등감을 보상하고 인정받기 위해 그는 늘 경쟁적이었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잘 해내면서도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따랐다.

그것은 자기가 아무리 잘 해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적이 없고

오히려 때로는 야단을 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해도 또 배척(rejection)을 받지 않을까,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또 확인하고 확인하는 습성을 갖게 된 것이다.

때로는 이 두려움을 감추어 보고자 너무도 과감하게 일을 추진할 때도 있었다.


이처럼 K씨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열등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감추고 극복하고자 강한 경쟁심, 추진력, 완벽주의 등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 모순적이고 배타적인 것이다.


일을 확장하고 겁없이 추진해 나갈수록 열등감과 두려움은 겁없이 더욱 커진다.

그리고 이를 또다시 피하고 극복하고자 더 일을 확장하고 추진해 나간다. 일종의 악순환이었다.

K씨는 사업을 또다시 확장해 나가면서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더욱 가중되었고,

따라서 그 마음이 이를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돌출시키고 만 것이다.


K씨처럼 성공한 사람에게 열등감과 두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주위의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도 어려서 막연히 그러한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뿐,

자기는 완벽하고 자신감있게 일을 추진하는 사람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상담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자기의 속마음을 알게 되고

이를 받아들이기를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이를 인정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치료가 더욱 진행되면서 공황장애도 없어지고

자신이 가졌던 지나친 경쟁심, 열등감과 완벽주의도 많이 감소되었다.


생물체는 아픈 것이 있으면 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생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능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이나 열등감을 계속 느끼면서 산다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또한 누구를 미워하고 죄의식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도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다.

남들이 이러한 나의 약점과 나쁜 점을 안다는 것은 더욱 아픈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나와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막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 정신 의학에서는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라고 한다.

물론 이 방어기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옷을 입고 살아야 하듯 어쩔 수 없이 방어기제라는 옷을 입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방어는 불완전하고 임시 방편적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이것이 허물어지고 속마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정신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불안, 두려움, 미움과 외로움 등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며

심해지면 정신과를 찾기도 한다.


자신이 정신적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환자와 정상인의 차이는 단지 이 방어가 허물어졌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마음의 문제가 있다.

인간의 삶이 완전하지 못하기에 살아 가면서 반드시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보장되었던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인간은 분리(separation)와 배척(rejection)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 후 성장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필요가

항상 요구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열등감, 좌절 및 적개심 등의 상처를 경험한다.

그리고 개인의 특수한 환경에 따라 상실, 배척, 헤어짐 등의 상처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한 인간의 경험 이전의 경험까지도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실락원의 경험, 곧 안전한 낙원으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힘으로 살아야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 같은 경험이

이미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설사 이론적으로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지금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과거의 그 상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설사 문제가 있다고 해도 지금 잘 지낸다면 고통스럽게 이를 끄집어 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있겠지만 그 정도 문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임상정신의학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타탕하다.

정신의학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내면에 있더라도

그 문제를 잘 절충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K씨처럼 비록 열등감이 있더라도

이를 잘 승화시켜 사업을 열심히 해 나간다거나,

마음 속에 심한 죄의식이 있더라도

이를 자선 사업이나 선행으로 보상하고 잘 감추며 살아 간다면

반드시 그 사람의 내면의 문제를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정신의학과 신앙치료의 차이점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하는 이유와 같다.

성경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들까지도 죄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겉에 드러난 완벽하고 유익한 방어기제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죄와 병든 마음을 보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즉 중심을 보신다. (사무엘상 16:7)

율법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마음 속의 문제를 인지하고 드러내기 위해 주셨다. (로마서. 3:20)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많은 종교인들은 이를 반대로 이용하여

자신은 완전한 체 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감추는 데 사용해 왔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이라고 꾸짖으셨다.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이 성공적으로 살아 가는 사람이라도,

비록 환자로서 정신과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병든 마음의 환자로 나서야 한다.


이에는 예외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정신질환자들이나 정박아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잘 감추고 사는 사람들을 더 멀리 하실지 모른다.

마치 니고데모와 수가성의 여인의 차이처럼...


예수님께서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마태복음9:12)이 바로 이를 뜻한다.

모든 인간은 빛되신 예수님 앞에 그 속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도망가고 감추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의 갈등이 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모두가 이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만 할까?


일반적인 정신치료의 경우를 보자.

정신치료는 원칙적으로 마음속의 문제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나

무조건 이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다.


치료자는 먼저 환자가 이를 얼마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인지를 평가한다.

때로 이것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으면

오히려 그 고통을 덮어두고 방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드러내야 하는 경우도 환자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한다.


일반적인 정신치료에서도 이처럼 치료자의 세심한 배려가 있는데,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정신치료는

더욱 깊은 이해와 관심속에서 진행되지 않을까?


요한복음 4장의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예수님의 치료방법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모든 기독교 상담가의 가장 훌륭한 지침이 되기도 한다.

결국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속마음을 다 드러내고 마셨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불쾌한 저항을 보인 흔적은 전혀 없다.

이솝우화의 햇님처럼 따뜻한 이해 속에서 스스로 벗도록 하셨다.

아무도 그녀를 인정하고 받아주지 않았건만,

예수님은 먼저 그녀를 받아 주고 이해해 주셨다.


자기를 공격하고 비판하려는 사람에게는

자기를 숨기고 도망가게 되지만,

이처럼 자기를 진정으로 받아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고 방어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예수 안에서 우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약간의 아픔은 있겠지만 자신을 드러내고 위로를 받은 후의

가볍고 기쁜 마음에 비한다면 이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도 신앙으로 우리의 문제를 덮어 두고 방어해 가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 믿고 술과 담배를 끊고 열심히 교회 생활은 하지만

정으로 나의 마음과 성격이 변화되고 있는가?                     .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화를 내고, 완벽하게 살아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아직도 마음과 성격에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신앙이 자신을 치료해 주기보다는 더욱 병들게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여러 마음의 문제를 경험하며 산다.

군가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미워질 때가 있고,

누구를 좋아하고, 특히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아픔을 맛볼 때도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신앙적으로 어떡해야 할까?

무조건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참고 인내하며,

‘사단아. 물러가라 ’ 고 소리만 칠 것인가?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신앙 생활에서 아주 중요하다.

잘못된 신앙의 부산물이 결코 아니다.

이는 우리 속 마음을 볼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며,

이를 예수님께 드러내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문제를 잘 이해하고 신앙 안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일반적인 신앙적 노력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치료의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없다.

마음밭이 먼저 치료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씀을 받아도 그 말씀은 효력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치료자’ 라고 말씀하셨다.(출애굽기 15: 26)

그리고 예수님도 마음이 상한 자와 병든 자를 위해 오신 의원이시라고 말씀하셨다.(이사야 61:1,마태복음 9:12)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기 전에 이 말씀의 의미를 한번 더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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