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면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말들이 있다.
가장 큰 관심은 건강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떤 외관상의 손상이나 불구가 없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린 다음 조심스럽게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묻는다.
그 후 한숨을 돌린 다음 다시 묻는 말이 있는데 누구를 닮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든데도
억지로라도 누구의 모습에 끼워 맞추어 보려고 한다.
이렇듯 어른들은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서
먼저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쓴다.
아빠를 그대로 닮았다는 얘기에 남편은 은근히 기삐하지만
엄마는 속으로 조금은 섭섭해 한다.
종족 보존이라는 대명제에서 어느 부모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자기를 닮은 자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확인이라도 하듯
부모는 기뻐하기도 하고 서운해 하기도 한다.
나의 생명의 연장이라는 본능적인 인식에서
이처럼 아이의 생명은 시작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원초적 인식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부모와 지식간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형성시켜 나간다.
특히 자기를 닮은 아이에게 이러한 자기 투사적 인식은 강하다.
얼굴만이 아니라 성품이나 취미, 특히 공부하는 능력 등을 보아
그 일부의 닮은 모습과 기능으로 그 아이를 전부 자기인 양
그 아이에게 지신을 투사해 버린다.
아이가 부모를 안 닮을 수는 없지만 때로는 이를 통해
마치 자기의 복제품인 양 착각하고 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꿈꾸어 왔던 것, 좌절되었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그 아이에게 실현시켜 보려고 한다.
아이가 아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기준을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
때때로 자기가 밉고 짜증스러울 때는
괜히 자기를 닮은 아이에게 짜증을 풀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 역시 부모의 모방과 동일시를 통해 성장해야 하기에
이를 맹목적으로 수용해 나간다.
특히 사랑과 보호를 담보로 한 부모의 힘은 아이에게 아주 절대적이다.
부모를 닮지 못할 때의 배척과 불안전감 때문에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부모를 따르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서로의 이러한 생존적 욕구로
부모 지식간의 관계가 신혼의 밀월처럼 행복해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밀월은 기대한 것처럼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채워줄 수 없고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그 종속감이 점점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면서
그 밀월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짐은 서로를 지치게 하며
끝내는 서로가 같지 않음을 시인하고 만다.
이러한 투사적 관계는 나를 닮은 아이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 아닌 남편, 아내 혹은 시부모를 닮은 아이에게서도 일어날 수 있다.
가까운 가족일수록 쌓이는 감정이 많다.
그만큼 더 많이 기대하고 사랑을 받고 싶기에 그만큼 더 좌절과 실망도 크다.
이 좌절은 미움과 화를 품게 하며 미워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미워함으로 갖는 죄의식까지 합해져서 더욱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한다.
이러한 감정은 대개 억압되어 진다.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긴장되고 힘이 들기에 기회가 있는 대로 그 억눌린 감정이 분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무에게나 터질 수는 없고
부모의 경우 대개 자기에게 만만한 아이들에게 쉽게 터진다.
이런 경우 우리는 교묘하게 누구를 닮은 아이를 통해 터뜨린다.
남편에 대한 불만은 곧 남편을 닮은 아이에게 잘 터지고,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은 시어머니의 어떤 부분을 닮은 아이에게 더욱 쉽게 터지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아이라면 그럴 수 있는 평범한 잘못에도
필요 이상의 과잉된 감정이 폭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아이는 누구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른들의 감정의 종살이를 하게 된다.
부모의 힘은 아이에게 너무도 막강하기에
아이는 무던히 종살이에 익숙해져 살아간다.
그러나 아이는 이로써 자기를 찾아 나가는 데
많은 혼돈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더 많은 판단과 선택을
스스로 해야 하는 상황에 접할수록
아이는 더욱 당황해 하고 불안해 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위축되고 만다.
지금 나의 자식들을
내가 미워하는 누구를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 마구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모와 다른 그 아이로서의 인격과 정체감을
인정해 주고 있는지를 늘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