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질적으로 선(善)한 존재일까, 악(惡)한 존재일까?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논쟁도 해 보지만
아직 시원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무엇이 더 본질적인 속성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서 이 두 가지 선과 악이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두 가지 면이 있다.
한없이 착하고 순진해 보이다가도 게으르고 자기 욕심만 차리는 나쁜 모습들을 본다.
이럴 때면 부모들은 어디에다 촛점을 맞추어 교육을 해야 할 지 당황할 때가 있다.
이는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한밭에서 자라나는 것과 유사하다.
가라지를 보고 이를 뽑으려고 하면 알곡도 함께 뽑혀 버리고,
반대로 알곡을 잘 자라게 하려고 많은 영양분을 주면 가라지가 더 먼저 자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그냥 지치게 되어 어떤 원칙보다는
그때의 감정에 따라 해결해 버리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아주 엄한 집안에서 자라난 자녀들과
조그마한 잘못도 용서받지 못하는 엄격한 교육 속에는 감히 가라지가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있어야 할 생명력, 창의력과 선한 욕구까지도 억압되어
알곡까지도 자라지 못하는 결과를 빚어내게 된다.
반대의 경우, 모든 것을 수용해 주고 허락해주는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자신감과 의욕은 충만하지만 때론 무질서하고 이기적이고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
가라지도 같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바람처럼 알곡과 가라지를 선택적으로 자라나게 하는 교육이 무척 힘들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의 보상 욕구나 자신이 받은 교육대로 자녀에게 대하는 경향이 많다.
즉, 자신의 부모가 아주 엄격했으면 자신은 그 반발로
자녀를 아주 자유스럽게 키우거나
아니면 똑같은 방식으로 키우기가 쉬운 것이다.
자식 농사를 부모 자신의 입장에서 지으려고 할 때 늘 문제가 생긴다.
부모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몰두되어 자녀의 상황을 쉽게 잊는다.
대개 알곡은 연약하고 까다롭다.
그러나 가라지는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저항력도 강하다.
아름답고 귀한 화초일수록 많은 손길이 필요하고,
야생화나 잡초일수록 무관심 속에서도 그냥 잘 자란다.
대개의 부모들은 자녀들 속에 조그만 가라지가 보이기라도 하면
반사적인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며 당장 이를 뽑아 버리려고 하기에
그 연약한 알곡은 더 쉽게 손상을 입는다.
가라지는 뽑혀 깨끗해졌지만 자라야 할 알곡도 손상을 입고 시들어 버린다.
부모는 이 시든 알곡을 다시 키워 보려고 온갖 영양분으로 이 보상해 보지만
이제 알곡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한다.
언제 또 다시 가라지처럼 갑자기 뽑혀 버릴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신 때문에
부모가 쏟는 온갖 정성과 영양분이 그 속으로 스며 들어 가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아이에게 어른들의 기준에서 가라지를 보고 이를 뽑아댄다면
아마 아이는 숨이 막혀 더 이상 자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상처가 있으면 이를 먼저 치료해 주어야 한다.
어떠한 윤리적 기준이나 가라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가라지 때문에 더 소중한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라지는 뽑아야 한다.
그러나 알곡의 생명과 영양 상태,
그리고 이를 견딜 수 있는 저항력을 함께 보며 뽑아야 한다.
이는 나이와 지식의 정도로 평가할 수 없다.
나이와 지식이 많아도 아주 연약한 알곡이 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과 생명의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가라지가 무성해 보여도 알곡의 생명이 약해 보인다면
그 가라지는 그냥 두는 편이 낫다.
먼저 그 상한 알곡을 붕대로 묶어 치료해 주고
그 알곡이 좀더 강하게 자란 다음에 조금씩 가라지를 뽑아야 한다.
그리고 같은 자녀라고 해서 같은 가라지의 기준으로 뽑을 수 는 없다.
아이의 능력과 체질, 그리고 자라난 그때의 환경이 조금씩 다르기에
알곡의 상태를 보며 가라지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간에 서로 비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항상 가라지만을 예민하게 주시하며
이를 뽑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박적 완벽주의' 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인격 속에 움트는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며
가라지를 용납해 주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상대방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라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충분히 자라면 가라지는 쉽게 뽑혀질 것이라는 믿음과 기다림이
우리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성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