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사람을 살리는 말

007 RAMBO 2018. 8. 21. 13:50

"이제 세상을 알만한 나이가 된 것 같아

자식만은 애비같은 실수를 안 했으면 하는 뜻에서

열심히 가르쳐 봐도 자식은 듣지도 않고 

반발만하니 정말 답답합니다.


제 얘기가 틀린 것이 뭐가 있습니까?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아버지의 말이다.

'왜 좋은 것을 가르쳐도 배우지 않을 까요?' 하는 물음은

비단 이 아버지만의 심정은 아닌 듯하다.


바르고 참된 교육을 

그 어느 부모가 하고 싶지 않을까만은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교육이란 잘못된 점을 찾아 지적해 주고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점, 지금 잘 하고 있는 점보다

속 발전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을 

더 강조하고 그 점에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교육의 대상과 주체는 인격이다.

기계의 성능을 실험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고쳐야 할 것, 바로 되어져야 할 것을 그대로 얘기하고

이를 의지적으로 수행해 나가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 대상이 인격이 될 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격은 그 교육의 내용에 의해서만은 

결코 교정되어지지 않는다.


자동차의 다른 곳을 아무리 잘 고쳐 놓아도 

자동차틀 움직일 수 있는 

엔진이 병들고 그곳의 연료가 바닥이 나면 

그 수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인격도 마찬가지다. 

인격이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를 수행해 나갈 마음과 힘이 있어야 한다.

즉 인격의 원동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중요한 인격의 힘을 무시하고 

주변의 고장난 것만 고치려 하다가

더 중요한 인격의 원동력을 

마비시켜 버리고 마는 때가 종종 있다.


인격의 힘은 어디서 나을까?

우리의 인격은 과연 무엇을 먹고 살까?

육체에 필요한 좋은 영양분만 먹이면 될까?

아니면 지식과 자극을 먹이면 우리 인격이 힘을 얻을까?


부모들은 좋은 영양분과 잘 정리된 지식만 공급하면

자식이 성장하고 건강해 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인격은 여전히 영양 부족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의 인격은 인정 받음과 사랑을 먹고 산다.

이것이 인격을 살리고 성장시키는 에너지원이다.

이 인격이 살아야 자신감을 갖는다.


열등감이란 환경이나 자신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인격의 생명과 영양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감이 없는 인격은 

아무리 좋은 재능과 지식과 건강이 있다 해도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 


열등감은 집중력을 떨어뜨리고,

이로써 기억력과 이해력이 감소되어 

자신의 능력만큼 성적을 내지 못한다.


특히 심한 열등감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의 결여로

평소와 시험 때의 성적차가 아주 많이 나타난다.


이처럼 인격의 생명력과 자신감은 

학업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적 활동만을 강조하다보니

인격에 필요한 영양분을 소홀히 하거나 

오히려 굶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교육이란 잘못된 것을 찾아 강조하고 

이 개선하게 하는 지적, 의지적 요구인데

이와 동시에 틀린 것만을 지적받다 보니 

그 인격이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그 인격이 인정을 받지 못하여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할 때 

그 사실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을 같이 무시하고 비하시킨다.


또한 우리는 비판과 교육이라는 허울을 통해

상대방을 교묘하게 멸시하는 행위를 한다 .


겉으로는 올바른 분석이고 판단이지만

그 저의는 그것을 통해 

그 인격을 세우고 개선시키기 보다는

더 격하시키고 파괴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때가 있다.


판단 속에 무서운 독소가 깔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인격은 이를 의식적으로는 인지 못 할 지라도

이러한 의도를 전달받아 그 판단에 대해 

이상하게도 반발하거나 공격적이 된다.


내가 진정으로 누구를 위해 충고하고,

특히 자식을 바르게 교육하고자 하는데도

상대방이 이에 대해 뭔가의 반감을 내보인다면 

나의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하시키는 

무언가의 독소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독소가 있는 한 그 내용이 아무리 옳더라도

그 인격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움직인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말을 해도 

그 말이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다.


살리는 말은 그 속에 

그 인격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사랑이 있다.


'네가 그렇게 잘못은 했지만 

이 일로 결코 너를 무시하지 않으며

앞으로는 더욱 잘 할 수 있으리라나는 믿는다.’ 라는 

무언의 마음이 전달되는 곳에

바로 그 사람을 살리는 바른 교육이 있는 것이다.


몇 가지를 고치려 하다가 

그 인격을 죽여버리는 헛된 교육을 계속 할 것인가?


내 아이가 왜 반발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지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아내와 남편이 

왜 나의 판단과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상대방을 몰아 세울 것만이 아니라

자신은 이러한 문제가 없는 지를 

겸허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이성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림받음의 담보물  (0) 2018.10.28
알곡과 가라지  (0) 2018.10.06
빛을 먹고 사는 마음  (0) 2018.06.28
기다려 준다는 것  (0) 2018.06.25
새 술은 새 부대에  (0) 2018.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