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버림받음의 담보물

007 RAMBO 2018. 10. 28. 17:55

매년 한 번씩 큰 태풍이 몰아친다.

바로 입시 태풍이다.


일단 태풍이 일기 시작하면

2,3개월이 지나 바람이 잠잠해져야

모두가 다시 일상의 삶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그토록 무섭게 몰아

바람의 흔적과 상처는

그리 쉽게 아물지 않는다.


득히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한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 속에 갇혀져 있다.


외관상 그들의 아픔은 이제 잊혀지는 것 같고

그 나름대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도 잘 잠재워지지 않는 실패의 상흔은

가끔 견딜 수 없는 아픈 소용돌이 속으로

그들을 몰아가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러한 아픔을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하는가?


학생이라면 당연히 열심히 공부를 하고

또 시험도 보아야 하는데,

부모는 당연히 이를 위해 뒷바라지를 하고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데,

왜 이것이 그처럼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할까?


물론 더 쉬고 싶고 더 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공부해야 하는 학생의 마음이 즐거울 리야 없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는 자식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다.


그렇다고 그처럼

무거운 짐이 되어야 할까?


결코 이 행위만으로

이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공부 그 자체가 그토록 무거운 압박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일이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아무리 바쁘고 힘든 일이라도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작고 쉬운 일이라도 심한 스트레스가 되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반응이다.


대개는 그 일과 관련되어 부정적인 감정이 일 때

그 일은 비록 작은 일이라도 힘들고,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는

아무리 피곤하고 벅찬 일이라도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


그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은

화(Anger)와 분노이다.


입시가 주는 중압감도

결코 입시 자체나 공부의 양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입시가 주는 실패와 성공의 일회적 선택이

그처럼 고통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건이 우리의 마음에 던져 주는

부정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 감정이다.


이는 의식되는 감정이기도 하면서도

대부분 의식되지 않는 이주 원초적인 감정이다.


인간에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은

버림을 받을 때이다.


버림 받고 홀로 되었을 때의 그 고통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아픔인지를 알 것이다.


어린아이는 배운 적도 없는데 

어머니를 졸졸 따라 다니다


잠깐이라도 어머니가 안 보이면

불안해서 운다.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되는 것에

얼마나 예민한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아이가 의식하지 않는 본질적인 마음으로서

이 아이의 마음은 성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되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누가 날 비판하거나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예민한 의식 속에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관심과 칭찬을 받기 위해

그토록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버림받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 속에

그 언젠가부터 공부가 바로 그 버림 받음의

첫째 조건이 되어버리고 있다.


공부를 잘 하면 인정 받고,

공부를 못 하면 버림 받는

그러한 풍토가 되어 버린 것이다.


공부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의 아픔을 담보로 한

생존의 절규가 되버린 것이다.


공부는 인간 기능의

극히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적 기능은 뇌 기능의 일부분으로

키가 크고 작은 것처럼

지능도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다.


성적은 그 사람의 체질이고 성격이지

그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잘 할 수 있는 뇌의 체질과 성격일 뿐

그 사람의 전체 능력은 결코 아니다.


체질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체질에 따라 그 체질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문화를 키워야 하는데,

우리는 왜 자녀를 한 가지 체질로만 균일화하려고 할까?


성적만으로 그 인격을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비인간적 풍토는 개선되어야 한다.


설사 이러한 문화 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녀만은 이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


물론 부모는 계속해서 공부를 잘 하도록

자녀를 격려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격려 속에는

'공부를 못하면 넌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잘 하면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라는

무언의 마음이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경우도 사랑과 버림받음을 담보로 하여

자녀에게 무엇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체질과 선택의 문제이지

전 인격이 버림 받는 고통으로 남아서는 안 될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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