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사춘기의 아이와 어머니

007 RAMBO 2019. 1. 21. 09:25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고 발육해 갈 때

그 어머니도 다시 태어나 성장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아이와 같이 자고 깨고 놀며 

같은 마음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춘기 아이들의 문제도 

아이만이 갖는 성장기의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아래 이야기는 아파트촌에서 가끔 있는 일이다.


네다섯 살 난 꼬마가 수퍼마켓에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어머니가 잠깐 장을 보는 사이에 혼자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그런 일이 전에도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놀겠거니’ 하고 계속 물건을 골랐다.

그러나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아이는 가게 앞에 없었다.

가볼만한 데를 왔다갔다 하며 둘러보았지만 아이가 없어 당황한 어머니가

마침 주말이라 집에 있던 남편에게 연락하고 

같이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좀처럼 나타나지를 않았다.


다행히도 한 시간쯤 후에 멀리 떨어진 아파트 놀이터에서

떤 아이와 재미있게 놀고 있는 자기 아이를 찾아냈다.

반갑고 기뻐해야 할 어머니였지만 아이에게 화가 났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매우 야단을 쳤다.


그러자 아이는 엄마에게, 처음 보는 아이이지만

자기에게 과자를 주며 놀이터에 가서 같이 놀자고 해서 따라갔었다고 말했다.

함께 놀던 그 아이는 같은 또래인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하루 종일 밖에서만 사는 아이 같았다.

얼굴이 시꺼멓고, 옷도 남루하고 아주 더러웠으며 외로워 보이는 아이였다.


어머니는 그 아이와 재미있게 놀고 있는 자기 아이를 야단치며 떼어놓았다.

동무를 잃고 멍하게 서있는 그 아이의 눈망울을 무시한 채,

아니 그 아이를 원망하는 투로 노려보면서 어머니는 자기의 아이를 낚아채왔다.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아이에게 말했다.

"아무나 과자를 사준다고 따라가지 말거라.

과자를 사준다고 다 좋은 친구가 아니란다.”


어머니가 다시 아이에게 주문했다.

"그런 모르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아라.

어디 갈 때는 꼭 엄마에게 물어보고 가야 한다.”


그날 저녁 교회에 다니는 그 부모는 아이를 다시 찾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느 때처럼 기도하였다.

“이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고통받는 자, 어려움에 있는 자의 친구가 되게 하소서!”


그 아이는 아직 어리기에 부모가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로 따를 것이다.

아무나 과자를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친구를 사귈 때도

그 친구를 부모가 좋아할지 먼저 살핀 다음 사귈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어느 때인가 이러한 부모의 교육과 요구에 반발할런지 모른다.

그때는 아마 사춘기쯤이 될 것이다.

어떤 아이는 무조건 부모가 교육해 온 것에 반발하여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공부도 때려치우고 이른바 나쁜 아이들과 사귀며 밤늦게 돌아다니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영화 '더티 댄싱' (Dirty Dancing)에 나오는 딸처럼 아버지를 쏘아 붙일지 모른다.

인간 평등과 어려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외쳐온 아버지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순수한 인간 평등과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들 것이다.


어떤 아이는 행동으로 반발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부모가 요구하는 것에 꼬집어 내기 어려운 반발심을 갖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반발심으로 느끼지도 못하고 뭔가 과거에 열심히 해오던

공부와 착한 일들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게을러지고 산만해지기도 한다.

부모가 요구한 대로 계속 열심히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고 죄의식을 느끼게 되어

친근하던 어머니의 눈을 웬지 모르게 피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부모는 대체로 두 가지로 반응한다.

그 하나는 ‘누가 뭐래도 자기는 옳다는 확고한 신념’ 을 가지고

아이에게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고 나무란다.

또 다른 반응은 부모의 심한 죄의식과 당황함이다.


학교나 교회에서 배운 대로 교육하지 못했는가?

너무 버릇없이 키웠는가? 너무 억압하며 무섭게 키웠는가?

과잉보호를 했는가? 너무 무관심했던가? 

결혼 초 불안정한 부부관계나 고부간의 갈등으로

아이들에게 아무렇게나 신경질을 퍼붓지 않았나?

강박감에 사로잡히기 쉬운 성격 때문에 아이도 그렇게 키운 것이 아닌가?

내가 유달리 그 아이만 미워한 것이 아닐까?


특히 직장을 가졌던 어머니는 죄의식이 심하다.

때로는 어머니로서 자신감을 잃고 심한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반성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사춘기는 부모가 아무리 잘 하고 최선을 다해도 

생길 수 있는 필연적인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쌓인 잘못된 관계가 한번 정리되고 넘어가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나친 죄의식은 금물이다.

필요한 반성을 넘어선 죄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과잉보호와 문제를 낳는다.

때로는 모순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상 방식으로 교육하기도 한다.


앞에 얘기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보자.

너저분한 다른 친구와 놀지 말라고 야단친 자기의 교육이 모순된 줄은 알지만,

그렇다고 과자를 사주면 아무나 따라가도 좋고, 아무나 믿고 의지해도 된다고 교육할 것인가?

성경말씀에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지만, 이 험한 세상을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너만 그런다고 되는가? 세상은 너를 이용할 뿐이기에 지혜롭게 대처해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주장도 무리하지만은 않다. 어쩔 수 없는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런 교육이 완전한 것이었다고 정당화 하지는 말자.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었지만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때와 가능성까지 묵살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로보트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에 의해 살아가는 점이다.

비록 아이가 부모에 의해 태어나지만 부모의 부속물이 아니고,

언젠가는 독립된 개체로, 자아로 성장한다.

자기의 행동과 느낌과 생각은 자신이 조절하고 행하기를 원하며

그 전체의 자아 현상을 자기 정체감(Identity)이라 말하기도 한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단계적으로 독립한다.

자아 정체감도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간다.

그러나 아이는 성장 과정에서 두서너 번의 강한 자기확립시기를 갖는다.


첫 번 과정이 서너 살 때쯤이다. 이때 아이들은 '나' 라는 주어를 많이 쓴다.

'내' 가 하겠다고 주장한다. 나의 세계,나의 물건 따위를 열심히 챙긴다.

이때부터는 어머니가 없어도 혼자 잘 논다.

어머니로부터 신체적으로 떨어지며,일차적인 자아를 형성하는데

이것을 일차 분리 개인화(Separation individu- ation)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기 확립이 충분치 않다.

대개 십대에 이차 개인화 과정이 발생하는데, 이를 보통 사춘기라 부른다.

사춘기에는 신체적으로 더 성인이 되어가며

정신적으로도 다시 한 번 부모로부터 독립하며 자기를 형성한다.


부모가 심어준 여러 가치들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기의 것이 아니면 거부한다.

이제는 자기 스스로 해 보고 싶어한다. 

특히 과잉보호를 받았던 아이들은 이런 경향이 강하다.

물론 동시에 아이는 혼자 하는 것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독립과 의존의 두 가지 감정 속에서 방황하고 혼란해 지기도 한다.


과잉보호는 자녀 대신 부모가 모든 것을 결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아이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실수하고 반성하게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는 이러한 것이니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항상 결론과 정답만을 결정해 주며 그 과정에서 아이를 무시한다.


'이런 친구를 사귀어라. 이런 옷을 입어라. 이런 음식을 먹어라.'하고 간섭하며,

심지어 아이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미리 정해 준다.

특히 크리스찬 부모에게 이런 과잉보호가 더 많은 것 같다.

신앙과 윤리까지 결정해 주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꼭 보호해 주는 부모가 종종 있다.


이러한 보호와 결정된 세계 속에서 살아온 아이는 자기 스스로 해 본 것이 없기에

사춘기가 되면 뭔가 숨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느끼며 어떤 일을 혼자 해 보려고 애쓴다.

물론 지금까지 혼자 해 본 적이 없기에 당연히 서투르다.


그래서 부모가 보기에 위태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부모는 그것을 보고 "그것 봐라. 네가 뭘 한다고 그러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하고 야단치며 자기가 또 다 결정해 버린다.


아이는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심한 좌절감과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에게 할 말을 잃고 

그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멍하니 부모를 다시 따라가기도 한다.


이처럼 사춘기의 현상은 그 아이의 성격, 부모와의 관계,

환경에 의해 다양하게 드러날지 모르나

역시 그 중심되는 문제는 자아 정체감의 형성이다.


사춘기의 예수와 마리아


우리는 때로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 흥미를 갖는다.

예수님도 인간이 겪은 모든 것을 겪으셨다기에(히브리서 4:15)

분명히 이러한 사춘기도 겪었을 것이고, 어머니 마리아와도 상당한 갈등을 경험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십대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은 누가복음 2장 41 52절이다.


어린 예수가 열 두 살 되는 해에 유월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돌아올 때

마리아는 예수가 그들 속에 있는 줄 알았다가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서야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흘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얘기하는 예수를 만난 얘기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어떻게 양육했다는 기록은 성서에 직접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 관련된 사건으로 보아 예수를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조심스럽게 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처녀 때 천사의 계시와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로 인해 온갖 오해와 수모를 다 받으며 예수를 낳았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에, 이를 잘 참으며

그 계시대로 잘 키우기 위해 어떤 어머니보다 더 애썼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과잉보호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귀중한 아들 예수를 아무곳에서나 아무 애들과 놀지 못하게 했을 것이며,

공부도 열심히 시켜 예루살렘의 일류 랍비 학교에 보내고 싶었을 것이고,

영양 관리나 행동에도 많은 간섭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보호와 기대 속에 살아온 예수로서는 사춘기가 되면서 뭔가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이 누가복음 2장의 사건으로 터졌는지 모른다.


사흘 동안 초조하게 찾아다니던 마리아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예수를 보고

아마 몹시 화가 난 말투로 무척 꾸짖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오히려 당당히 어머니에게 면박을 주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알지 못하였나이까”하며 어머니의 염려를 묵살해 버렸다.

지극한 효자였던 예수가 왜 어머니를 무시했을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고 예수의 사춘기로 생각된다.

마리아가 만들어 준 나로부터 - 비록 그것이 천사의 계시를 받은 정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

자신의 정체감을 찾고자 하는 예수의 답변이다.


예수의 정체감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아버지 집에 당연히 있어야 했다.

이 세상의 어떠한 기대와 요구에 의해 예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일을 마리아 앞에 엄숙하게 선포하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사춘기


한 개인으로 성숙해 가면서 자기 정체감을 찾아보자는 것이 아이의 사춘기라면,

자기 아이와 더불어 다시 한번 커가는 어머니에게서의 사춘기는 무엇일까?

아이는 이렇게 커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동안 어머니는 과연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아이의 사춘기는 그 아이에게보다 어머니에게 더 중 요 한 의미를 갖는다.


어머니는 아이보다 적어도 이삼십 년 더 살았다.

그러니 아이의 문제보다 휠씬 더 복잡하다.

친정 부모와 형제들, 어머니의 실제 사춘기, 결혼 후 남편,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들과의 관계 따위로 얽히고 섥혀 있다.


소녀 적에 또 결혼 전에 가졌던 꿈들이 결혼과 함께 닫혀지고,

결혼 전에는 남편과 대등한 느낌이 있었으나 결혼 후 남편은 계속 자기 발전을 해 나가는데,

자기는 가졌던 꿈마저 잃게 되고 자꾸 뒤로 처지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때로는 자기가 매달리는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해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미 아이를 가진 어머니라 함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도 없다.


이렇게 자기가 가정 속에 닫혀졌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자기를 실현하고 찾아보고자 한다.

때로는 화초에 자기의 생명을 부어보기도 하고

집안 장식, 돈, 종교 등에 자기 마음을 쏟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식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의 경우는 다른 대상과 다르다.

자식은 때가 되면 어머니의 그러한 자기 실현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다.

자기이기를 바라지 어머니의 자식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수처럼 마리아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자기 정체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어머니는 여기에서 큰 좌 절 을 겪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어머니는 자식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부인한다. 

'나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애들만 잘 되면 되지 내가 덕볼 것은 없다.' 고 한다.

자기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희생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여기서 이러한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희생이거나 자기 실현이거나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자녀의 성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면,

그 깊이만큼 자녀도 어머니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사춘기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자기 아닌 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어머니는 그 사춘기의 아이로 인해 숨겨진 자기 아닌 자기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리아가 자기의 기대대로 만들어 놓은 예수를 자기로부터 벗어던진 것처럼,

어머니는 조용한 명상과 기도를 통해 이를 깨닫고 벗어 버려야 한다.


어머니가 그 껍질을 벗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식의 사춘기도 큰 의미가 없다.

성숙한 어머니로서 자기의 정체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과거와 다른 자식과의 관계, 즉 새로운 믿음과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춘기의 의미이다.

어머니도 아이와 같이 계속 성장해야 하며, 아이와 같이 사춘기를 맞아야 한다.


사춘기가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면,

어머니에게도 이 사춘기가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리고 아이와 같이 그 성장의 고통도 나누어야 한다.

아이의 정체감을 인정해 주고 소유하지 않을 때

더 새롭고 건강한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했던 사춘기의 예수도

지막 십자가에서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기억하자.

그 아들을 아들로 놓아 주었을 때 그는 아주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더 진실된 새로운 아들로 다시 다가올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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