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봄철 우울증

007 RAMBO 2019. 4. 8. 14:35

대개 화사한 봄날이 되면

어둡고 굳어있던 마음이 풀리면서

괜히 들뜨기도 하고 명랑해진다.


푸르른 나무와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을 보면

마음이 왠지 뿌듯해지며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겨울철에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사람들도

꽃을 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밝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만물이 소생하고 마음도 밝아져야 하는 이 따스한 봄날에

유독 마음이 더 어두워지고 닫혀지는 사람들이 있다.


외래를 방문한 한 회사원의 경우이다.

따스한 봄날이 되면서 몸이 나른해 지기 시작하더니

매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업무상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외에도

더 이상 일을 만들어 하기도 싫고,

펜을 잡고 글을 쓰려고 해도

손에 힘이 없어 기안하기도 싫어진다고 했다.


입사한 지 4년째였다.

입사 후 상사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서 입사 동기중 가장 우수한 사원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고,

좋은 부서로 옮겨져 승진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도 했다.


보고서를 기안할 때는 옆에 있는 여사무원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직접 자기가 타이프를 쳤다.

그리고 오자가 있는지 여러 번 확인을 한 다음 결재를 맡으러 갔으며,

보고 받는 내용이 있으면 반드시 현장을 확인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빈틈 없이 정확한 사람으로 상사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지만,

본인은 틀린 것을 점검하느라 늘 긴장하여 피곤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직장에서 업무만 이렇게 완벽하게 해 내려고 애쓸 뿐만 아니라,

퇴근한 후에 집에 가서도 늘 같은 식이라는 것이다.

모든 집안 일에 대해서도 부인에게 맡기지 못하고

이것 저것 체크하며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부인도 결혼 초에는 술도 안 마시고

가정에 충실한 것 같은 남편의 자상한 면을 좋아 했으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이를 남자답지 않은 소심한 간섭으로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간섭의 배후에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부부간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격 때문에 쉬지 못하고

또 부인과의 갈등 때문에 집에서도 편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스트레스를 푸는 성격도 아니었다.


결국 이 환자의 문제는 회사 업무를

지나치게 완벽히 해 내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하는 만큼 쉬지 못하는 것이 이 환자의 병이었다.


긴장이 오래 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를 견디지 못한다.

몸은 몸살이 나고 마음은 대개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왜 이런 우울증이 봄에 발생할까?

이 환자는 회사 일도 이제는 익숙해졌고

상사들의 인정도 받게 되어

과거보다 편하고 덜 긴장해도 된다고 했다.


더욱이 봄이 되면서 뭔가 나른해지며

긴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른한 채 쉬고 싶으면서도

'이래서는 안 되지. 뭔가 해야지' 하며

또 다시 자신을 재촉하고 압박하는 마음을 느꼈다고 했다.


대개 우울증은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고

다소 긴장감이 풀릴 때에 지주 발생한다.


흔히 환자들은 예전에 이보다 더 힘들 때도 거뜬하게 견디었는데,

요즘은 전에 비하면 너무 편한데도

왜 우울증에 빠지는 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은 반드시 현재의 긴장이나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부터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봄철과 같이 나른해질 때면 슬그머니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봄철 우울증의 정체이다.


일은 열심히 하고 완벽하게 해낼수록 좋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푹 쉴 수 있는 시간들이 적지 않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결코 우울증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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