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기다려 준다는 것

007 RAMBO 2018. 6. 25. 18:40

"이젠 더 할 얘기가 없어요. 

아무에게도 얘기 할수 없었던 저의 마음이었어요.

얼마 전 우연하게 국민학교 동창을 졸업 후 처음으로 만났어요.

그 친구가 저를 보자 대뜸 "너 음대 다니지?"하고 물었어요.

전 얼마나 당황하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는지 몰라요.


사실 국민학교 동창들은 제가 학교 다닐 때 바이올린을 했던 것을 알고 있어요.

무대에도 몇 번 서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지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서는 그만 두었답니다.

왼쪽 손을 다치게 되어서 거의 일년 동안을 그만두었어요.

전 바이올린을 너무나 사랑했어요. 다들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고요.


특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일년을 쉰 저에게

다시 물리치료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시작해보자고 강력히 권했어요.

그래서 다시 조금씩 해 보았는데 예전 같지 않았어요.


정말 너무나 답답해 많이도 울었어요.

의사 선생님도 다시 바이올린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했고,

어머니와 선생님도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시 전처럼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어요.

바이올린만 잡으면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그냥 그만두고 말았어요.

지금은 제가 바이올린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렇게 내 스스로 말해보는 것은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


자신이 과거에 바이올린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것을 남에게 말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대단한 비밀도 아닌 것 같은데...


그 학생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학생은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고 자랐다.

그만큼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에 많이 의존했었고 예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기대하는 것을 열심히 잘 해내어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특히 어머니는 과거 자신이 어려서 바이올린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딸에게서 실현하고 싶었고,

그 딸은 열심히 해서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거기에다 음악성과 재능도 있어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

많은 사람의 인정과 기대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더욱 열심이었다.

더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고 싶어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비싼 악기를 사주고

좋은 선생님까지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바이올린을 하면 할수록 긴장이 되고 힘이 들었다.

정말 잘 하고 싶었지만, 때로는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마음까지 들 때도 있었다.

뒤에서 기대하는 어머니를 보면 도저히 그런 내색을 할 수도 없기에 그저 열심히만 했다.

중학생이 되고 예술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바이올린에 대한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젠 취미도 아니고 전문 직업인의 길을 가야 하는데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의 기대를 채워줄 수 있을까?'하는 등 두려움이 점차 고조되었다.


당시 이름 의식할 수 없었던 학생은 손을 다치게 되고

이를 핑계로 바이올린을 아주 포기하고 말았다.

어쩌면 손올 다친 것도 무의식적 동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그 두려움과 불안은 피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로 마음의 허전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커졌다.

실망하는 어머니를 보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어머니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잘 하고 싶었던 바이올린!

이를 통해 채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사랑의 상실!

너무나 원했던 어머니의 사랑인지라 그 두려움도 커 결국 이렇게 피하게는 되었는데

이제 그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 학생은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열심히 했다.

재능도 있고 성실해서 하는 것마다 뛰어난 결과를 보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았고, 공부도 잘 해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지만 그 마음은 기쁘지 않고 늘 우울 속에 있었다.


도망갔던 마음의 상처가 그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랑을 포기했던 그 고통스런 기억.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아픈 마음이었다.

바이올린을 한 것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픈 마음을 숨기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이 이야기를 상담하기 시작한 지

1년이 되어서야 겨우 하기 시작했다.

이 단순한 이야기, 수 많은 이야기 들을 해 오면서

왜 이 이야기 만은 꼭꼭 숨겨 놓았을까?


학생은 몇 번이고 상담을 중도에서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하곤 했었다.

이에 대해 치료자는 결코 서두르거나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대로 오는 대로 가는 대로 기다려 주었다.

결국 1년이 지난 후에야 자기의 가장 깊은 곳을 드러낸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

'왜 당신은 마음을 닫고 사랑을 주지 않는가?' 라며

너무 급하고 강제적으로 상대가 마음을 열기를 요구한다.

당장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를 더욱 미워하고 배척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럴수록 더욱 두려움을 가지고 마음을 닫는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조용히 기다려 줄 때,

아무리 차갑고 굳게 닫혀진 마음일지라도 열리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조용히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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