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일을 한다.
특별히 많은 일을 바쁘게 처리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때로는 일들의 의미도 모른 채 일의 거센 물결 속에
그냥 휩쓸려 내려가 버리기도 한다.
일은 우리의 주위에 습관적으로 있어 왔기에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너무도 감각적이고 반사적이다.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이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는 것이 다소 생소하고 어색할지는 모르나,
일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한번쯤 진지하게 물어봄직한, 무척 중요하고도 의미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특히 그 '일'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그 일의 의미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나에게서 그 일은 무엇인가? 그 일을 왜 내가 하고 있는가?
조용히 지신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는 질문들이다.
일은 우리에게서 하나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일에 대해 생각하기 앞서
나와 일반적인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원론적인 생각을 먼저 전개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철학에서도 나와 대상의 관계는 아주 중요하다.
진리의 대상을 내가 추구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
그러나 칸트 이후 인식론에서는 나와 대상의 구분은 사실 힘들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대상이란 없으며
나의 인식에 그 대상이 영향을 받는 그러한 나의 연장인 것이다.
이 '나'를 얼마나 어떻게 배제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현대 철학의 과제이며 방법론이기도 하다.
정신 의학에서도 철학과 마찬가지의 '대상관계론'이 전개된다.
나와 대상은 결코 구분되어 떨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는 무수한 대상들을 대상으로 만나지 못하고
나의 것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는
그 부모 자체가 아니라 아이의 부모이다.
즉 한없이 연약한 아이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아이의 연장으로서의 부모로서,
이를 아이의 '자기적 대상' (self object)이라고도 한다.
부모 또한 아이를 아이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장으로서 자기화시켜 본다.
대상을 그 스스로의 개체로 보지 않고
자기에게 채워져야 할 환상과 꿈을 실현시켜 줄
또 다른 자기적 대상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결혼을 대상으로 찾는 배우자 선택에서 이러한 자기 대상화 현상은 더욱 뚜렷하다.
사람들은 연애를 할 때 대부분 진정한 마음으로 대상을 만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있는 것 같은
자기 환상과 채워져야 할 자기를 사랑하려 한다.
이러한 대상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 속에서도 나타난다.
일이 거기 있음으로 한다. '일은 나의 대상이며 나는 일을 하는 주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많은 경우 착각이다. 일을 나의 연장으로, 나의 것을 채워주는 환상의 도구로 생각한다.
물론 이를 의식하고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의식하는 범위에서는 그 대상의 자기화 현상에 대해 부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나 난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배제된 그 사람과 일을 만난다.'고 단언할런지 모른다.
대부분의 이러한 관계는 무의식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는 의식하지 못한다.
흔히 우리는 무의식을 비과학적인 신비의 세계로만 생각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의식도 의식과 같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의식과 같은 실재성과 과학성을 갖는다.
나와 대상의 무의식적 관계도 가상적인 것만은 아니며
실제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실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관계는 보통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관계에 위기가 왔을 때 그 본질성을 드러낸다.
즉 그 대상이 나의 꿈과 자기 실현을 더 이상 채워줄 수 없을 때,
그 본질성이 의식화 되는 것이다.
결혼 후 많은 경우에서 연애 때와 다른 배우자를 발견한다.
자식과 부모에서도, 일들에서도 그 기대대로 되지 않고 실망하거나 실패할 때가 있다.
이러한 경우 생각보다 심하게 좌절하고
때로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만일 그 일이 단순한 대상이었다면,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인정한 채
다른 대상을 찾아 새롭게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렇게 쉽게 대상을 옮기지 못한다.
그것은 내가 그 일과 대상 속에 깊이 박혀 있다가
그 일이 허물어지면서 그 속의 자기도 같이 허물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이러한 현상을 바꾸어 말하면 나의 존재가 그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지나치게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나' 란 존재는 그 대상에 종속된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그 대상이 허물어지면 자기도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대상은 늘 우리가 요구해 온 대로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허물어질 것들이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고,
내가 아끼던 물질과 사업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나의 건강이 이를 계속 누릴 수 없고,
때로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늦은 때도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정말 바쁘다.
너무들 미친듯이 살고 있다.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업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이 바쁜 일들 속에 나를 얼마나 만나고 있는가?
그 대상을 얼마나 대상 자체로서 만나고 있는가?
대상에 너무 몰두되어 그것이 허물어지는 날, 나도 허물어지는 것은 아닌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나의 고독한 모습을 조용히 응시할 시간들을 충분히 갖고 있는가?
고독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할 때만이 그 삶은 진정으로 새롭게 출발된다.
그것은 그 고독한 존재로서 또 다른 고독한 존재, 즉 이웃을 참되게 만날 수 있으며,
그 만남 속에 외로움이 녹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존재로서만이 진정하게 일을 즐기고, 이웃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일들 속에 함몰되어 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모든 일과 사람들을 벗어 던지고 조용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고독한 시간을 갖는 것처럼 의미있고 소중한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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