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말괄량이 길들이기

007 RAMBO 2018. 6. 14. 16:59

살다보면 성격이 너무 안 변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환경과 세월에 따라 조금씩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너무 정반대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성적이고 조용하였던 사람이 아주 활달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몹시 왈가닥이던 사람이 아주 얌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겉으로 보면 두 경우 모두 바람직한 변화일 수 있다.

그런데 가끔 후자의 경우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혀 문제없이 잘 지내오다가

언젠가부터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짜증스럽고 우울해지면서 외래를 찾게 된다.


"어릴 때 전 자전거를 그렇게 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번은 남자애들과 어울려 자전거를 타다 엄마한테 들켜

얼마나 크게 야단맞았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말괄량이였는지 잘 상상이 안가요.


그런데 다 죽었는 줄 알았던 그 기질이 요즈음도 가끔 나오곤 해요.

애들이 노래 부르고 춤 추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같이 어울려 노는 적이 있어요.

너무 재미있게 놀다 불현듯 '아참,내가 왜 이러지!'하며 주저 앉아 버리곤 해요.”


'말괄량이 길들이기'가 옛날 세익스피어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유교적인 문화권 속에 살아온 우리나라에서도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시집갈래. 여자는 얌전해야지. 너 같이 왈가닥인 여자에겐

어떤 남자도 하루를 못 버티고 다 도망가겠다.

그러다가 시집가서 쫓겨나면 어떻게 할래?”


너무 많이 들어온 잔소리라 늘 흘려듣다가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을 먹는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자기도 모르게 얌전해지기 시작한다.

부모는 애가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무척 기뻐한다.

'이젠 선을 봐도 괜찮겠구나!'하며 얼른 맞선을 보게 하며 시집을 보낸다.


처음 시집생활을 할 때에는 바짝 긴장을 한다.

혹시 자기의 옛날 못된 성격이 나올까봐 무척 조심한다.

조금이라도 그러한 성격이 나오면 자기를 마구 질책한다.

시집 식구가 지나가는 얘기로 지적만 해도 긴장하고 자책하며 자기를 꾹꾹 억누른다.

시부모는 이러한 며느리를 아주 좋아한다.

'아니 저렇게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있나!'

사돈끼리 가끔 만나면 서로 고마워하며 그녀를 칭찬한다.


그 사이에 그녀는 점점 더 위축되어간다.

이렇게 자기 주장도 제대로 못하고 십여년을 살다보니

이젠 누가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늘 감시받듯이 긴장하며 계속 살아간다.

또 이렇게 이삼십년이 지나가버린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무료하고 답답해진다.

그렇게 얌전하고 순종을 잘 하던 며느리가, 아내가 점점 신경질이 늘어난다.

자신도 갑자기 자기가 왜 그러는지 몰라 답답해한다.


주위에서는 갱년기 현상이라고들 위로하기도 하지만 더 짜증만 난다.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진다.

불면증까지 생기고 두통이 심해진다.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으니 '우울증'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이와 같이 표현하곤 한다.


"아니, 아무 신경쓰는 일도 없는데요.

남편도 너무 잘 해주고 시부모님들도 너무 좋으세요.

자식들도 이젠 다 컸고요.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데 왜 내가 우울증이죠? 하고되묻는다.

이 부인의 말대로 이 가정은 너무 행복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부인 자신은 이렇게 행복하게 가꾸어놓은 가정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 가정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자기(自己)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부인은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어한다.

그동안 이 행복한 가정을 위해 억눌려서 신음하는

또 다른 자기의 소리를 듣고는 괴로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말괄량이일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신나고 즐겁게 놀며

거리낌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그 자기를 찾고 싶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기는 살기 위해 만들어졌던 삶의, 현실의 자기였다.

무서운 부모의 말 때문에, 좋은 남편과 시부모의 버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들을 위한 새로운 '나'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나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숨기고 억눌러 왔다.

더 이상 그 어두운 곳에서 답답하게 눌려 살 수 없었던 그 '나'는

새로운 '나'에게 호소하기 시작하며

제발 나를 내보내 달라고 하면서 나의 혼동이 생긴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 이것이 우울증의 정체였다.


과거에 이러한 말괄량이는 아니였어도

지금 나는 나를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한번쯤 정말 진지하게 자신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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