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흐르는 강물처럼

007 RAMBO 2019. 9. 28. 08:08

“이곳에 오기 위해선 한강을 건너야 해요.

그런데 전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아요.

전 나중에 직장을 다니게 되면 꼭 한강을 건너면서 다니고 싶어요.

물은 정말 풍요로워요. 어머니 품속과도 같아요.

이 물이 저렇게 흐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요.”


외래를 찾은 한 여학생의 고백이다.

매일 출퇴근시 한강을 건너며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들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말이다.

어떻게 하면 강을 안 건너고 출퇴근을 할까 하고 궁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사치스러운 말이 될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 여학생에게는 너무나도 절실하고 진실된 표현이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해 무척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무척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내가 무슨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망설인다.


그 소원이 간절할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이 두려움 때문에 늘 사람의 주위에서만 맴돌고 만다.

문을 두드리기만 하고 문을 열어 주면 곧장 도망가버린다.

다시 문을 닫으면 또 달려와서 두드린다.

늘 사랑을 확인하려고만 하지

주어진 사랑에 대해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

더 크고 완전한 사랑만을 항상 추구한다.

그래서 더 좌절하고 움추려든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얘기를 들을 때 아마

'이러한 일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에게서나 있는 일이겠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난 아이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하며 자신들의 자녀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여학생은 결코 결손 가정의 아이가 아니다.

부모의 많은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은 지나칠 정도였다.

흔히 말하는 과잉보호의 형태였다.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보호밖에 모르고 자라났다.

자기의 모든 사랑을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자라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어떻게 하느냐에 온통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이의 입장에서 반응하지 않았다.

아이를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감정 상태대로 아이를 대하기에

아이는 어떻게 해야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물론 공부 잘 하고, 시키는 과외 활동을 잘 하면

어머니가 기뻐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집중이 안 되고 성적이 떨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을 회복할 수가 없다.

점점 불안해진다.

어머니의 성화하는 모습이 뒤에서 어른거린다.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어머니가 쳐다보는 것에도 압박감을 느낀다.


괜히 반항하고 싶고 나를 찾고 싶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다가

지금까지 모든 것을 어머니가 해주었기에

나 혼자 무엇을 한다는 것이 엄두가 안 난다.

그래서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에 더 집착하게 되나

이제는 공부도 안 되니 어머니의 사랑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제 포기한 듯 공부 못해도 괜찮다고 하나 더 불안하다.

이젠 기대마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자신감도 없다.

어머니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싶지만

어머니의 기대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아 사랑을 할 자신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도 다가가기가 어렵다.

‘어머니처럼 못한다고 야단을 치지 않을까.

자기를 배척하지 않을까’ 해서 막연히 두려워한다.


이 학생의 마음은 어느덧 굳게 닫혀지게 되었다.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할 수 없는 사랑.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려고 해도 열 수 없는 마음.


그러나 치료를 통해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다시 열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막혀있던 강물이 아직은 시원하게 흐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한강의 물처럼 시원하게 흘러내릴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그 학생은 한강의 흐르는 물을 그토록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 사랑은 한 곳에 고여 있어서는 안 된다. 흘러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흘러가야 하며,

우리의 필요한 사랑도 그 누군가에 의해 흘러져 채워져야 한다.


흘러 들어오는 물을 우리가 막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면서 우리는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는 사람이 없다

불평하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시원하게 흘러 내리는 한강을 바라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혹시 고여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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