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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3 - 열등감

007 RAMBO 2015. 6. 15. 10:41

제 3 장 열등감 - 이성훈

 

누구나 죄인이듯이 우리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바로 이 열등감의 문제를 치유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더라도

이 열등감 때문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축복을 내려 주셔도

내가 열등감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내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히 그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서도 두려워 벌벌 떠는 종처럼,

자녀의 영이 아니고 그저 벌벌 떠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왜 힘이 없습니까?

왜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없습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 있는 열등감, 그것이 치유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일까요?
열등감이란 자기가 자기에 대한 평가를

너무 낮게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니 지혜가 없도다’라는 말씀이

너무 자기를 비하시켜 자신에 대해 아주 낮은 개념과 평가를 갖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지능지수가 평균치에서도 훨씬 이상인 학생이 열등감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없다’라는 생각만 할 때

그 학생은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다가도 중요한 시험이 닥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를 푸는데 긴장이 되서 생각이 잘 나지 않아서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조급해지면서 굉장히 당황하게 됩니다.

 

성적이 평상시에는 아주 우수한 학생인데도

정작 중요한 시험에서는 번번히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뻔히 아는 문제인데 자기가 왜 동그라미를 틀린 답에다 치고 나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열등감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틀리면 어떻게 하나,

내가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집중이 안 됩니다.

지적인 능력은 마음이 안정이 되어야 제 실력이 발휘됩니다.

 

집중이 안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머리가 있더라도 좋은 성적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데 있어 인간의 두뇌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고 마음의 안정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머리는 뛰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신감을 가지고 열중하면

어떤 부분에든 성공을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남보다 비상해서만은 아닙니다.

자신감과 용기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무리 비상하다 해도

 내가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있으면

그 좋은 머리,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그저 길에다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귀한 달란트가 자기 것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남자들의 경우 간혹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될 결정적인 시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감이 없거나 열등감이 있으면

여러가지 좋은 조건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결정을 하거나 또한 적시에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배우자가 있더라도

내가 열등감을 갖고 잇으면 자신감이 없고

“내가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진정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누리지 못합니다.

 

남들이 “당신은 좋은 아내, 혹은 좋은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시겠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불안합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적당한 아내, 적당한 남편이었으면 했는데

너무 자기 기준보다 높다고 생각하니까

그것이 열등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어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자꾸 부정적으로 나가다 주어진 것마저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도 열등감은 작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시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셔도

우리에게 열등감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을 뭘 보고 사랑하실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데!

죽도록 고생을 하고 댓가를 치러야 용서를 받을까말까인데!

하면서 받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열등감을 깨닫고 정복하지 않는 한

풍성한 삶, 승리의 삶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열등감은 이처럼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열등감은 언제 형성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 부터

그러니까 태아에 있을 때 부터 부모의 태도로 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점점 더 자리를 잡게 됩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남이 평가해 주는 것에 기준을 두고 스스로를 평가합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남들이 나를 평가해 주고 대해 주는 것에 따라서

자기가 자기 평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주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줄을 자기도 무의식 중에 느끼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사람이구나”하는 개념을 갖습니다.

 

어려서부터 미움을 받고 자라면

“나는 나쁜 사람이구나”하는 열등감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심코 해 준 말 하나하나가

아이의 자아 개념을 형성시킨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올바로 교육하지는 못 하면서 교회에만 무턱대고 나가라고 하면

아이는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데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크게 망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를 잘 양육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등감은 버림받을 때 생깁니다.

또 열등감은 다만 쫓겨난다라는 행위적인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여러가지 심리적인 경우도 포함합니다.

이런 경우 나는 가치가 없고 환영받지 못할 나쁜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상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잃어버렸을 때에도 열등감이 형성됩니다.

 

열등감 하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생각합니까?
신체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신체적인 장애, 또는 키가 작거나, 살이 너무 찌거나 말랐거나,

코, 눈, 입 등이 못생겼다는 외모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열등감을 많이 갖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의 재산, 자신의 학력 등 주변의 환경으로 인한 열등감 또한 많이 갖습니다.

내가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고, 대학교는 나왔는데 이름도 없는 삼류 대학을 졸업했고,

아직도 방 한 칸짜리 전세집에서 살고, 우리 아빠는 아직 자가용도 없고,

우리 아이는 삼수를 하고 있다는 등의

눈에 보이는 환경과 재산을 가지고 비교할 때 우리는 열등감을 느낍니다.

 

또한 누구로부터 무시당하든지 버림받는 그러한 경험으로 부터 열등감이 생깁니다.
불행한 가정환경은 자녀들을 열등감적인 사람들로 키우게 됩니다.

너무나 무섭기만 한 아버지, 술만 드시면 온 식구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

하루종일 화만 내고 욕을 해대며 나를 미워하는 어머니,

항상 바쁘서 밖으로만 돌아 다니시며 나에게는 전혀 무관심한 부모님,

하루도 부부싸움을 거르지 않는 부모님 등,

그런 밑에서 자라는 자녀는 누가 봐도 버림받는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부족함 없이 다 해 주지만

감정의 교류가 없고 사랑의 만남이 없는 가정 속에서 자란 아이는

상대적으로 배척을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또 열등감을 느낍니다.

 

또 아이에게 평소에는 잘 해 주려고 노력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감정적인 폭발을 자주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평소에 아무리 잘해 주어도 예측할 수 없이 비이성적으로 폭발을 하는 것은

아이에게 굉장히 큰 상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커서 남을 믿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 대해 주는 사람에게도 긴장을 합니다.

아이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감을 잃은 채 성장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이런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좋은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라도

그 시절의 아픈 상처와 기억이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갉아 먹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은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어도

내 마음에 받았던 그 상처는 아직도 나에게 열등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 안에서 치유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도 영향을 주어서

그 당시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식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아내의 경우 남편이 아무리 잘해 주어도 남편을 괜히 의심하게 됩니다.

“남편이 과거 아버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술을 먹고 들어와서

이유 없이 나를 때리지는 않을까? 하는 식의 의심이 계속 들게 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영향을 줍니다.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시고 무섭기만 했습니다.

하나님도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런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조금 늦으면

목사님이나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처럼 야단을 칠까 봐서 두려워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긴장하게 되고 자유가 없고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신데 말입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상처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을 평생 그렇게 믿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이제까지 말씀드린 나쁜 조건과 이유만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과잉보호’하게 되어도 흔히 마마보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아이에게는 굉장히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알아서 하질 못하니까 자신감이 없어지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되지를 못합니다.

 

결국 아이가 스스로 살아 보려는 기회를 빼앗아 버림으로써

낮은 자아감을 갖게 하고 이로써 심한 열등감을 갖게 합니다.

 

부모가 나이에 맞는 과제를

스스로 할 수 있게 선택권과 믿음을 주어야 됩니다.

과잉 보호는 일단은 편하지만

그 속에는 자신이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결국 열등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과잉 보호가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과잉 보호를 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먼저 우리 내면에 어려서 받은 상처와,

그것을 보상하고 싶어하는 기대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이에게 자기가 못 한 것에 대한 욕구를 채우려 합니다.

 

특별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할 때

세상에 자기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자녀는 자기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기 때문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녀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자녀한테 반영됩니다.

 

즉 자기가 보기에도 자신이 불쌍하니까

자기하고 닮은 애를 자신처럼 보호해 줌으로써

아이를 통해 자기를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려서 부모한테 사랑받지 못한 것,

지금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모두 다 아이에게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내면에는

아이를 사랑해서라기 보다

자기가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외적 내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열등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주님 안에서 열등감을 해결하고 나면

더 이상 문제가 없습니다.

 

전에는 내 학력, 내 환경이 두려웠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는 자신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깊이 경험하면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을 더 기억하십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못된 짓만 하다가 거지가 된 탕자가

자기 아버지 집이 그리워 회개하고 돌아 오는 것,

그 한 가지를 보시고 그 동안 잘못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아버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자녀에게도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잘하는 것은 안 보이고 잘못하는 것만 보입니다.

잘못한 것, 실수한 것, 정리되지 않은 것을 아주 예민하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하는 것 하나를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부모는 잘하는 것이 아홉 가지라도 잘못하는 것 한 가지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아이에게 야단을 치고 벌을 세웁니다.

 

허구헌날 그 한 가지 때문에 야단을 맞으니까

아홉 가지의 능력이 있는 아이인에도 이것 때문에 아이가 열등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인정을 못 받는 것, 미움, 불신, 나는 안 된다는 부정적 사고에 빠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언뜻 알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과잉 보호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젖먹이처럼 품으시고 젖을 먹이시고,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지시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니까

철저한 과잉 보호를 하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세상의 어느 부모보다도 완전하시고 치밀하시지만

항상 그 원칙대로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친 광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그 속에서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십니다.

 

문제는 보호의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보호해 주시지만

올바른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그 보호를 다소 푸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해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많은 경우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서. 여자이기 때문에, 집이 가난해서’ 라는 등의 말로 환경을 탓합니다.

물론 환경도 중요합니다만 이렇게 환경만 탓하고서는 열등감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전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라고 하는 이상은 치료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인의 일부분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상하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눅15:4-6절에 아흔 아홉 마리의 건강한 양과 열등한 양 한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흡 아홉 마리를 돌보지 않으시고

이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찾은 즉시 야단을 치시는 것이 아니고

즐거이 어깨에 메고 내려와 벗과 이웃을 불러 즐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열등하게 숨어 있는 우리,

자신감 없어 숨어 있는 우리를 이렇게 찾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 보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반기시고 이렇게 즐기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놓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