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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치유 2 - 원마음과 드러내기

007 RAMBO 2015. 6. 14. 13:05

제 2 장 원마음과 드러내기 - 이성훈

 

마음이 상한 자

범죄 후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변질되었습니까?
가) 상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사61장 1절의 말씀에는 죄가 들어오면서부터 마음이 상했다고 하였습니다.

원어의 의미는 ‘깨졌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감싸 주셨는데 죄로 인해 하나님 품을 떠나는 순간

마음이 땅에 떨어져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관계로 되어 버렸고,

결과적으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버림받는 것입니다.

욥은 다른 사람이 다 버리고 떠났을 때도 개의치 않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절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란 말씀에 나타났듯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버림받음’이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배가 고프고 사랑이 그리워집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두렵고 굶주린 마음으로 남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은 또한 열등감을 가져오며,

점차 불신감이 생기면서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또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려 합니다.

 

그 다음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있는 것은 죄의식이며

죄의식은 항상 자책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자책감이 커지면 나는 못난 사람이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열등감으로 발전합니다.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병들어 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게 되고 죄의식과 같은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생긴 원마음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에게도 원마음은 있습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유전되며 이로 인해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굶주린 마음 때문에 서로에게 나눠 주지 못하고

채우려 하다 보니 남의 것을 빼앗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또 남에게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또 원망과 분노와 열등감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삽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마음이 죄로 인해서 깨어진 후

이 원마음을 고치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고치러 온다는 것은 영어의 표현을 빌린다면

‘broken heart'한 것을 ’bind up'한다.

즉 ‘깨어진 것을 하나로 묶어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항시 서로 상충이 되며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굶주린 마음이 있으면 서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원심력,

즉 마음의 원천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누구에게 다가서고 싶은데,

원망과 두려움과 열등감이 있어 다가가지 못합니다.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먹지를 못 하니까 더 배가 고프게 되는 것이

인간의 원천적인 갈등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산산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어진 사람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도 믿지를 못 합니다.

한 번 튕겨보고는 그냥 도망 가버리고 맙니다.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까 하는 열등감과 죄의식 때문에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그리고는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원망과 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또 내가 버림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받고 싶으면서도 가까이 가지를 못 합니다.

마음 졸이고 두려워하며 영원한 갈등 속에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깨어진 것이 묶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굶주림을 묶어 주시기 위해서

무한하고 풍성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데도

우리가 열등감과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지를 못 하고 받아들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날마다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가는데

왜 예수가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깨진 마음 때문입니다.
상한 마음 때문에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고친다는 것은 깨진 것을 수리해서 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을 아무리 부어주셔도

모두 새어 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도 우리는 굶주리게 되고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그릇을 고치는 것이 바로 치유이며 그래서 치유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상한 마음의 치유가 중요한데도 치유되지 못하는 것은

상한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매일 굶주림과 두려움, 외로움과 미움,

그리고 열등감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들 감추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달리 내세울 것 하나도 없이 자존심 하나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다든지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평소에는 무던해 보이던 사람이 분이나서 어쩔줄을 몰라합니다.

어떤 심한 열등감이 마음 속 무의식 가운데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 많은 상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상한 마음을 항상 지니고 산다면 제대로 살아갈 사람이 거의 없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죄인인지 몰랐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죄인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것은 이전 부터 우리 마음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못 느끼면서, 감추면서 살았던 것 뿐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을 만남으로써,

이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평생 상한 마음을 느끼면서 살 수 없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것을 느끼지 못하도록 가죽옷(무의식)을 입히셔서 그 죄를 가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가려도 그 상한 마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못 느끼면서 살게 된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식이나, 남편, 또는 물질(승용차, 아파트 등)이나,

명예등으로 자신들의 열등감을 보상받고 남들에게 인정을 받을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무력함과 열등감이 드러날까봐 조바심을 내며 괴로와 합니다.

 

나)우리의 원마음을 물질을 통해 감추고 살아갑니다.
사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통장에 돈이 없으면 좀 불안해집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만큼 주실 줄 믿고 있지만

그래도 통장에 얼마 만큼은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다) 대인관계를 통해 깨어진 부분을 보상받으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에 세상과 일과 물질과 자식과 사람들에게 붙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나의 빈 곳을 채워 주고 보호해 주고 보상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사람들에게 바랍니다.
사람들 속에서 보호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열심히 충성합니다.

친구는 똑똑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만 골라서 사귑니다.

 

이렇게 자기 주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또 그런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놓음으로써

자신이 안전해지고 확실히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자기 주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며 살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라) 심리적인 방어 기제들로 자신을 감추려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신념, 지식, 이상을 믿으며 추구하기도 합니다.
“나 외에 이 세상의 다른 것은 믿을 것이 없으니 나의 신념대로 나만 옳게 살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식의 자기 의를 아주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최대의 긍지와 자존심으로 생각하며 삽니다.

 

이 사람들은 얼핏 옳게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누가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경우 참으로 무섭게 변합니다.
자기가 세운 의의 기준에서 남에게 해도 안 끼치고

그렇다고 도움도 안 받은 소위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자존심은 참 무섭습니다.

 

포로된 자
포로된 자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더 의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다른 것이 없고 그저 남들이 하는대로 좇아서 합니다.

세상 일에 중독이 되어서 포로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세상 일에 포로된 우리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갇힌 자
갇힌 자는 포로된 자와 거의 비슷한 뜻이지만

그 상태가 좀더 심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포로는 매여 있기는 하지만 외면적으로 보면 자유롭습니다.

세상에 사는 것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는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포로된 것입니다.

 

그러나 갇혀 있다는 뜻은 완전히 그 자유마저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꼼짝없이 갇혀 움직일 수도 없는 묶임의 극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경에서는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중풍병자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은 오래된 포로 생활을 하게 되면

모두 심한 학대와 종살이에 지치고 묶여 갇힌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의 인간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유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철저히 가난해져야 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있는 한 가난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와 자식도 있고, 좋은 직장도 있고, 돈도 꽤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난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고,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을 철저히 감추고 외식하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몹시도 싫어하셨습니다.

그들은 위선자들 이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착하여서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고 질투심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꾸미거나 숨기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모습도 어른들처럼 억지로 감추려 하지 않고 드러냅니다.

 

안 그런 척하다가도 누가 옆에서 다그치면 금방 시인합니다.

아이들은 싫으면 그냥 싫고, 욕심 나면 그냥 욕심 나는 대로 행하고,

기분 좋으면 또 그냥 기분 좋은대로 합니다.

 

어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철저히 위장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일지라도 이해 타산의 관계가 있다면

몇 번이고 웃음 띤 얼굴로 악수를 청합니다.

어른들은 몇 개의 가면을 지니고 살지만

어린아이들은 착하지는 않더라고 감추지는 못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시고

모든 것을 드러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 스스로 드러내려 하지 않을 때

드러내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우리를 아프게 하십니다.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마음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빛은 곧 드러내는 것으로 그 안에 감추어질 것이 없습니다.
그 빛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서 완전한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준을 통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게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마치 가슴 속에 암덩어리를 지니고서도 x-ray가 투과하지 못하게

앞에 납덩어리로 막아 놓고 자신은 이상없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을 만족시킬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시고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보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우리를 노출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혹시 더 다칠까봐 조심스럽게 우리의 문제를 여시며

우리가 감당 못할 때는 오히려 덮어 주시고 숨겨 주시는 자비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십니다.

강제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가능한 스스로 조금씩

자신의 상한 마음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 분이기에

오래 참으시며 이를 기다립시다.

 

절대 두려워 하지 마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준비해 주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