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사이래(有史以來) 가장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물질적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사회 안전망도 확충되었으며,
학교·병원·교통과 같은 주변 환경도 매우 편리해졌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지금처럼 잘 산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
즉 불확실성시대(不確實性時代)라고 말합니다.
변화가 너무 심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아이러니(Irony)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를 살면서
왜 불안해하는가?
이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대고 있는 삶의 터전
즉 사업, 재산, 명예, 권력, 가정 등이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질서정연한 상태가
무질서 상태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불안이
사람들 마음속에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20대는 학업과 입시, 취업,
30-40대는 결혼과 출산, 자녀 양육,
50-60대는 직장과 사업,
건강과 노후 문제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교육, 정치, 군사, 남북문제 등
우리에게 불안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쥐 100 마리를 철창 안에 가두고
영양식을 규칙적으로 넣어 주었습니다.
철창 밖에는 고양이 몇 마리를
끈으로 묶어 두었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100일 후 죽은 쥐들의 사체를 해부해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쥐가 심장병, 암,
위장병 등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그 모습만 보고도 두려움과 불안에 떨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한 번쯤
환난이나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에게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큰 위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논문과 주장 때문에 1521년 1월 3일 이미 파문되었지만,
이후 다시 한 번 자신의 주장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1521년 4월17일에 있을 보름스 제국의회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기 위한 황제의 소환일 뿐이라는 것을.
그곳에 가면 현장에서 잡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악마가 보름스에 있는 기왓장처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고 의지를 다지며 보름스로 향했습니다.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1월 27일부터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의 국외 추방령을 선포하려 했었습니다.
다만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의회에서 심사하도록 요청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진 상태였습니다.
4월 16일 보름스(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 주에 있는 도시)에 도착한 루터는,
실권자들로부터 다음날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해 하루의 말미를 얻었고,
드디어 4월 19일 더 많은 의회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변론하고
성서에 의거해서 그것이 오류라는 명확한 증명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코 취소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재판정(裁判廷)에서 그의 저서와 논문에서 주장하는 것들을
모두 취소하라는 엄명이 내려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취소할 수 없습니다.
내 양심에 거스르는 일을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며
바른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 내가 있습니다. 오, 하나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드디어 황제의 심판과 교황의 파문 명령이 확정되었습니다.
루터는 두려웠고 우울감에 사로잡힐 정도로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개혁의 정신은 점점 더 재생산되고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그는 이러한 위기 속에 있었지만 종교개혁의 동지였던 멜랑히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여! 시편을 노래하자!” 그 시편이 바로 46편입니다.
46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로 시작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용기와 격려를 줄뿐만 아니라
삶에 평안을 주는 대표적인 시(詩)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불안은 문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
즉 마음가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관점을 바꾸면 될 일입니다.
우리의 가치관만 바꾼다면
그 어떤 불안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점이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관점이 바뀐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관이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치환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성령님을 섭리하시는 분으로 믿지 않고서는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기독교적 가치관,
즉 기독교적 세계관이란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적 세계관을 가진 자만이
“친구여! 시편을 노래하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홍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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