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릇한 새싹이 돋아난 언덕에서
따스하게 내리쬐는 봄볕을 쪼이며 앉아 있었던 그 옛날의 추억,
그 옛날 고향 뒷동산 언덕에서의 따스한 봄날을 그리워 하며
잠시 그 속으로 날아가 본다.
긴장되고 쫓기던 마음과 몸은 그 봄볕에 이내 나룻나룻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쫓기고 긴장된 우리들의 생활에 이러한 추억의 환상은 오아시스와도 같다.
충분히 시간을 내어서
한번 고향에 다녀오기도 어려운 바쁜 도시 생활!
그래서 환상은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짧은 시간에 복잡한 교통 지옥을 거치지 않고
단숨에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 준다.
환상이 있기에 각박하고 억압된 삶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 남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그 환상이 우리를 너무 강하게 지배하여 현실을 차단한 채
우리를 환상의 노예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중독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나갈 곳은 없다.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그 아무도 없는
외롭고 삭막한 삶! 아무리 몸부림읍 쳐봐도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다.
인간은 이렇듯 자유와 사랑을 찾아 한없이 헤매인다.
그런데 누군가 이 자유와 사랑을 채워 주지 못할 때
인간은 스스로의 환상을 통해 이를 채우기 시작한다.
좌절과 고통이 심해 스스로의 환상이 잘 그려지지 않을 때는
약물과 술을 의지해서라도 그 환상을 맛보고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고 배고프다.
그 환상은 더욱 더 절실해 지고,
마침내 그 환상은 인간을 지배하게 되어 끝내는 이에 중독되고 만다.
이것이 약물과 술에 중독되는 인간의 마음이다.
처음에는 환상에 중독되다 나중에는 약물과 술 자체에 생물학적으로 중독되어
무서운 악순환에 빠져 들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에로의 중독은 비단 약물과 술 같은
화학 물질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부딪치는 인간 관계와 일 속에서도
우리는 이 무서운 환상의 중독을 보게 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환상만큼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그 환상으로 아버지를 그리고 만나며 살게 된다.
인자한 아버지, 항상 나를 귀여워 해 주고 받아 주시던 아버지,
이 환상은 그녀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된다.
그리고 그 환상을 실제의 삶 속에서 이루기 위해
그 환상의 주인공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 두렵다.
'혹시 그 환상의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비슷한 사람은 만나겠지만 똑같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혹시 아버지와 달리 날 무시하고 야단치면 어떻게 하나?'
그 갈급함의 정도와 함께 두려움과 의심은 더욱 커진다.
현실의 불안은 또 다시 그 환상에 더욱 집착하게 한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고 환상대로만 채워질 수는 없다.
그것은 환상의 대상인 상대방도 자신의 환상을 갖기 때문이다.
남편은 환상 속의 어머니와 같은 완벽한 아내를,
아내는 자신의 환상적 아버지와 같은 완벽한 남편을 원하기 때문에
그 환상은 채워지기 보다는 깨어지기 바쁘다.
때로는 서로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며 강한 불신감과 원망을 터뜨리기도 한다.
계속 그 환상을 고집하다가 끝내 헤어지는 부부도 있다.
이런 갈등의 배경에는 항상 환상에로의 중독이 있다.
환상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고 붙잡고 살았기에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조금이라도 환상이 깨어질 것 같으면
마약 중독자가 약기운이 떨어져 불안해 하듯이 떨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속인 것이 아니라 그 환상이 서로를 속인 것이다.
왜 인간에게는 헤어지는 고통이 이토록 큰 것일까?
그것은 헤어지는 아픔보다는 그 사람을 통해 자신이 키워온
환상의 부서짐에 대한 고통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사람뿐만 아니라 권력,돈 그리고 일을 통해 유사한 환상을 갖기도 한다.
사업가들에게 흔히 있는 일중독이나 정치인들의 권력중독들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환상은 필요하다. 간혹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절망 속에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독특한 생명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상은 항상 현실 속에 접목되어져서
서로의 진실과 생명력을 교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환상은 때로 현실 속에서 부서지기도 하며 재구성되기도 한다.
우리는 현실과 환상의 그 어느 하나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느 한 쪽의 시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환상이 없이는 생명력있는 사랑이 시작될 수 없다.
사랑은 동시에 성장하는 것이며 사랑의 환상에만 중독되면
그 사랑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항상 자기 환상만을 고집하는 유아적 사랑이 되고 만다.
진정으로 그 환상을 현실 속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환상을 떠나고 부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나에게는 어떠한 환상에로의 중독이 있을까?
부서질 준비는 되어 있는가?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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