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무조건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이유 없이 괜히 싫은 사람이 있다.
한 때는 너무 좋아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냥 시시해지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그 사람이 변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을 보는 마음은 이렇게 요사스럽게 변한다.
정신 치료를 받아온 한 환자도 이러한 자신의 마음 때문에
무척 당황해 하며 이렇게 질문해 왔다.
"선생님, 저는 그 친구가 너무나 좋았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아무 일도 아닌데
그냥 그 친구가 하는 매사가 자꾸 미워지니 괴로워 죽겠어요.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변하지요?”
환자는 일남삼녀의 장녀였고 부모가 모두 교직에 계셨다.
어머니가 직장에 나가시니 자연 장녀였던 환자는 어머니 역할을 알게 모르게 해야 했다.
다른 동생들은 늦게 들어을 수도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다닐 수도 있었지만
환자는 늘 긴장하며 동생과 집안 일을 보살펴야 했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 오셔서 잘못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먼저 환자를 불러 야단을 치신다.
동생들이 잘못한 일도 어머니는 환자를 불러 야단을 치시는 것이다.
잘 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도 아니고, 못하면 모든 잘못이 자기에게 돌아온다.
동생들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하고
자기 주장과 불평을 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좋아했던 그 친구는 정반대였다.
어느 경우에나 서슴치 않고 자기 주장을 늘어 놓는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할 때 늘 상대방을 의식하며 긴장하는 자기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환자는 이러한 친구의 활달한 점이 너무 좋아 아주 친하게 지냈다.
자신에게 없는 면, 그렇게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면을
그 친구를 통해 만족할 수 있었기에
그 친구를 그토록 좋아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많은 경우 이러한 심리가 이면에 있다.
자신이 갖고 싶은 이상을 채워줄 수 있는 면을 상대방이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을 때,
그 상대방을 특별한 이유없이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환자가 면담을 통해 자신의 억압된 부분들이 치료되기 시작하면서
성격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꽤 자기 주장도 하고 상대방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면서 이 친구에 대한 감정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갖고 싶은 성격, 그 면을 자신이 할 수 있게 되니
더 이상 그 친구의 그런 면이 부러울 것도 없고 그냥 평범한 느낌이었다.
이를 의식적으로 느낀 것은 아니지만 치료를 받으면서
언젠가부터 그 친구에 대한 호감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자신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 친구가 미워지기 시작한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환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신도 다른 동생들처럼
부모에게 의지하고 불평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장녀라는 입장 때문에 항상 이를 강하게 억누르며 살아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후 그 억압은 다소 풀리게 되었고 자기 주장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때론 자기 중심적 불평을 하고 의지도 해 보지만 아직은 어색하였다.
곧장 죄의식이 생기고 '그러면 야단맞는다'는, 어려서부터 받아온 그 억압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자기 주장도 해 보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억압하고 죄의식을 갖게 하는 무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친구를 미워하게 된 이면에는 이러한 억압된 죄의식이 작용되었던 것이다.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이 억압되어 있을 때는 그 친구의 그런 점을 이상적으로 바라고 좋아했지만,
이제 억압이 풀리고 내가 실제로 느끼고 드러내기 시작하니
자신의 그런 점이 좋으면서도 무의식에서는직 이를 죄악시하는 무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점들을 보이고 있는 그 친구를 나 대신 미워하게 된 것으로서,
사실은 그 친구의 그런 점이 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드러나기 시작한 자기 중심적인 마음이 미운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자신의 들보는 못 보고서
남의 눈의 티는 쉽게 발견하는 마음이라 하셨다.
사람들은 싫어하는 마음의 들보를 숨기고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의 눈의 티를 비난한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나의 마음의 들보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계속해서 상대방의 티를 미워함으로써 나의 들보를 숨기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나의 들보를 깨닫고 용서해 주는 순간, 남의 티는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는다.
서로 자기 마음의 이유 때문에 좋아했다, 미워했다 하며 사는 것이 세상의 만남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나를 좋아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그대로 흥분하고 화를 낼 필요도 없다.
마음의 들보가 만들어낸 허구적 감정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만남에는 어쩔 수 없이 이러한 허구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더욱 깊은 만남을 위해서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의 부족한 들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 보이며, 이를 서로 용납하고 이해함으로써
들보의 허구적 감정이 아닌 인간 실제의 진실된 감정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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