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환상 속의 하나님 사랑

007 RAMBO 2017. 8. 20. 00:04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며 살지만,

생존의 문제가 해결이 되고 나면

무언가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으려는 욕구에 매여

그것을 얻으려고 또 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육체가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하듯,

인간의 정신 세계가 지식과 자극을 받아야 하듯,

인간의 인격과 영혼도 사랑을 받아 먹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


깨어진 우리 마음


사랑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설레이며

얼마나 좌절하고 슬퍼하는가?


이 굶주린 사랑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사람을 만나지만

허기진 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쉽게 채워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처럼 필요하고 좋은 사랑이라도

때로는 정말로 고통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 될 때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들 속에 있는 사랑의 문제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는 지를 먼저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해서

그 사랑이 나에게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

왜 이렇게 어렵게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사랑, 무엇이 문제일까?

인간은 사랑의 대상을 만나게 되면 사랑만 하려고 하지

사랑을 하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원하는 지는 알지 못한다.


이는 마치 배고픈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

그는 음식만 보면 무조건 달려들어 입에 넣으려고 하지,

자신이 그 음식을 씹고 삼키고 소화와 흡수를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살펴보지 않는다.


그래도 소화기의 경우는 위장과 장의 소화 능력이 쉽게 판단되지만

우리의 마음의 경우는 내가 그 사랑을 씹고 소화 흡수를 시킬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음의 대부분은 무의식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속을 모르고 무조건 사랑을 삼켰다가 내뱉기도 하고,

설사하기도 하고, 심한 복통을 일으켜 죽을 고생을 하기도 한다.

결국 사랑의 문제를 바로 알려면 우리의 마음을 바로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상해 있다고 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여”(이사야 61:1)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치신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마음이 상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해 있다는 것은 단지 병들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깨어져(broken)있다는 뜻이다.

사랑을 하는 우리의 마음이 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의 위장이 깨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도 모르고

단지 몹시 배가 고프다고 해서 음식을 먹는다면 더 큰 탈을 겪게 될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우선 위장이 새지 않게 묶는 수술을 해야 하고

이것이 완전히 아물었을 때에 음식이 나에게 진정한 영양이 된다.


깨어진 마음도 마찬가지다.

깨어진 마음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깨어졌을까?

물론 처음부터 깨어진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함으로 깨어진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죄가 들어옴으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공급받던 모든 것들이 중단되었다.

우리의 영이 가장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의지하다가 버림을 받을 때

그 충격과 이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내가 전적으로 의지하던 사람으로부터 한번 버림을 받게 되면

우리는 그 이후 다른 사람을 만나기가 무척 두려워진다.


그것은 다시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저 사람도 또 다시 나를 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신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하나님의 자비로 살려 내보내신 것이 큰 은혜이건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이를 은혜로 간직하기 보다는

버림받은 아픔으로 더욱 깊이 기억된다.


그런데 굶주린 마음이

이를 채우려고 대상을 향해 달려갈 때

이 버림받은 마음은 그 두려움과 불신으로써

오히려 그 대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숨게 만드는 힘을 발휘케 한다.


그래서 우리의 한 마음에 두 가지 방향의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즉 굶주린 마음은 원심력으로, 버림받은 마음은 구심력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이 두 가지 상반된 힘이 결국 우리 마음을 갈라지고 깨어지게 만든 것이다.


환상과 현실


우리는 바로 이 깨어진 마음으로 사랑을 하기에

사랑이 잘 되지 않고 고통스럽다.


하나가 될 수 없는 마음으로 사랑을 하기에

그 사랑이 깨어지고 만다.


그 사랑이 깨어져서 아파하기 이전에

그 마음이 먼저 깨어져 있음으로

그 사랑이 깨어지게 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아주 적응력이 강하다.

비록 우리 마음은 깨어졌지만,

이 깨어진 것으로 살아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병은 있지만 어떤 병적 적응력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깨어진 마음도 이를 적응하는 방법을 찾게 되고,

이를 이용하여 우리의 병적 문제를 감추고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깨어진 마음에서 생긴 여러 가지 병적 적응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한 하나가 환상이다.


물론 환상이란 기능이 병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건강한 정신 기능 중에 하나이다.


특별히 어둡고 추운 겨울을 지날 때

곧 봄이 올 것이라는 꿈과 환상은 인간에게 아주 큰 힘을 준다.


‘꿈과 환상이 없는 국민은 망하고 만다.’는 말처럼,

환상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건강한 정신 기능이다.


그러나 이 건강한 기능이 병적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주림과 버림받음으로 깨어진 마음이 꿈꾸는 환상은

건강하기 보다는 매우 병적이다.


굶주림에서만 오는 환상,

즉 내가 언젠가는 배부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맛있게 먹는 장면이나 풍성한 식탁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굶주림을 이겨볼 수 있다.


여기까지 건강한 기능일 수 있으나

그 속에 버림받음이 있다면 그 환상은 환상으로만 끝나게 된다.


굶주림은 그 환상이 현실로 되기 위해 노력하나

버림받은 마음은 그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하기에

항상 그 환상에만 머무르고 집착한다.


도대체 상상이 안 되는 모순이지만,

우리의 마음에는 이 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지면

그 환상을 더욱 절대적으로 강화한다.


그리하여 현실을 의심하고 거절함으로써

계속하여 환상으로만 머물게 하는 것이다.


환상으로 머물러 있는 한

그곳에는 버림받을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즉 환상은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으면서도

현실에서 버림받을 위험이 없는,

그래서 깨어진 마음의 갈등을 그대로 수용해 줄 수 있는

멋진 병적 적응 양식이 된 것이다.


인간의 만남에서, 특히 두 부부간에

이 병적 환상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

그 부부는 끝내 자신의 환상만을 고집하다가

하나되지 못하고 만다.


물론 연애와 결혼 때는 자신의 환상으로 만난다.

이 남자가 혹은 이 여자가 이런 사람이길 바라고 꿈꾸며,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환상에 접합시켜

그 환상이 즉각 채워진 것으로 착각하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후 많은 사람들은

서로의 환상과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환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다시 만나면서

차츰차츰 다시 결혼 생활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환상이 깨어지는 아픔은 있지만

현실 속에서 다시 엮어가는 실제의 사랑이 있다.


이것이 결혼 생활의 아픔과 행복인데

병적 환상을 가진 경우엔 결코 자신의 환상을 포기하거나 깨어나지 않고

상대방이 자기의 환상에 맞추어 주기를 계속 요구하게 된다.


서로 상대가 변했고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기에

결코 그 가정은 현실 속에서 다시 출발하지 못하고 만다.


하나님의 사랑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이처럼

인간의 사랑에 대해 깊은 이해와 통찰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만날까?

우리의 깨어진 마음과 환상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환상으로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만나기 원하시며

우리의 굶주린 영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고 그 사랑을 그릴 때

그 사람의 영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분명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데도

그 영은 계속 굶주림 가운데 빠져 있고

늘 허기진 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사랑하기 원하신다.


이 사랑의 마음이 성경의 아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아가서는 왕과 한 천한 여인, 포도원에서 일하는

한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글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며

완성되는 지를 아주 깊게 잘 묘사한 글이다.


이 글은 단지 사랑을 서술적으로 노래한 그런 내용만이 아니라

사랑의 전개 과정을 포함한 이야기와,

사건이 있는 서사시와 같은 역동적인 시라고 생각된다.


이는 술람미 여인과 같은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왕과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가 하는

사실과 그 과정올 표현해 주는 시이다.


여기서 두 사람의 사랑의 고백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왕의 고백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적으로 동일하다.


“여인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아가서 1:8 10)


왕은 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한 이후 8장 끝까지

거의 같은 내용으로 계속 일관되게 그의 사랑을 고백한다.


언뜻 보면 그 여인도 왕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같은 내용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고백하는 내용들은

환상 속에서만 머물고 있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아가서 2장 3-13절까지는 여인의 사랑 고백이다.

그녀는 왕이 고백한 것처럼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 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가서 2:8 9)


라고 아름다운 고백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꿈 속의 사랑이다.


즉 그 바로 앞 절(아가서 2:7)에 보면

그녀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아 달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환상의 고백은 5장까지 계속되고 있다.

3장에서도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했으나(아가서 3:6)

그 사랑은 조금씩 발전되고 있다.


왕의 끈질긴 사랑의 고백 때문에

그 사랑을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만나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두려움 때문에

그 왕을 현실 속에서 만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 버림받은 두려움(깨어진 마음)이 5장과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5장에서 여인이 문을 잠그고 환상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왕이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여인이 잠에서 깨어 문을 열어 보니

그가 벌써 물러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 불러보고

물어도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여인의 사랑이 환상 속에만 있지 않고

현실 속에서 일어날 때의 두려움을 묘사한 것이다.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그러나 왕의 고백은 너무도 끈질기게 일관되어

그 여인은 6장부터 드디어 그 왕을 현실 속에서 조금씩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장 두려워 도망가고 만다.


그래서 군중들은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아가서 6:13)라고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사랑은 끝내 그 여인을 정복하고 만다.

그래서 7장 11절 이하에는 처음으로 ‘우리’ 라는 말을 쓰고 있다.


환상 가운데 떨어져 있던 그 여인이

이제는 왕의 품으로 돌아와 하나가 된 것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왕의 품 속에서 하나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아가서 8:4)

여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왕에게 한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괄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가서 8:6)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께 피로써 그 사랑을 인쳐 달라는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과 불신은 하나님의 생명과 피를 그 증거로 보고 나서야

그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읍 만큼 크고 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끝내 우리에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의 사랑을 인쳐 주심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확실히

우리의 영 가운데 받아들이고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쉽게 말하지만,

우리의 깨어진 마음 때문에 이 여인처럼

환상 속에서만 그 사랑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의 마음을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겨놓고(아가서 2:14)

환상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직접 내 영 속에서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영적으로 고갈되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꿈은 그만 꾸고 이제 '나를 만나자' 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마음과 두려움을 아시기에 끝까지 기다리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인시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한다고 계속 고백하고 계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환상의 바위 틈을 깨고 나와

나를 지금까지 찾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맘껏 안겨 보자.


하나님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하고 계신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서 2:14)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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