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짝사랑하는 마음

007 RAMBO 2017. 8. 19. 23:03

살아가며 여러 형태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 강도는 각기 다르지만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는 것이 짝사랑이다.

대개 씁쓸해 하고 혼자만 간직하는 추억으로 끝내고 싶어 한다.

철이 들지 않은, 뭔가 성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감추고 싶어 한다.


특히 신앙 안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더욱 곤혹스럽다.

이성간의 교제가 절제되어야 하는 교회에서도

우리는 혼치 않게 이러한 일을 경험한다.

특히 결혼한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처럼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혼자 좋아하고 애태우는 경우도 있다.


대상이 미혼인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노력하여

짝사랑이 첫사랑으로 발전되어 자랑스런 무용담으로 남기도 하지만,

대개는 무척 난처한 경우에 빠진다.


자신은 이를 무척 죄악시한다.

어쩌다 딴 사람에게 알려지면 이러한 정죄는 더욱 가중된다.

때로 사단의 일로 경고를 받고 그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해서 짝사랑은 그럭저럭 해결될지 모르나

그 마음의 상처는 여간해서 아물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 아주 아픈 상처로 자리잡게 되고

그 이후로 갖는 사람 관계에 더욱 두려움과 불신을 갖게 되며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이를 무조건 피하고 억누르고 죄악시해야만 할까?

짝사랑은 왜 생기는 것이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이러한 관계를 주셨을까?

특히 신앙 안에서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이런 여러 문제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첫번째 경험하는 사랑은 자신의 부모이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컴플텍스’ 라는 이론을 구태여 도입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첫 이성의 경험은 부모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절대적으로 갈구한다.

그런데 갈구하는 만큼, 어떤 이유에서인가 채워지지 못할 때

그것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특히 남자 아이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여자 아이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경험이 있을 때

하나의 짝사랑의 형태로 그 마음 깊은 곳에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이 상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제2의 짝사랑으로 이어진다.


한 여학생의 경우를 보자.

이 여학생의 어머니는 결혼 전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남편은 일류대학을 나왔고 다소 권위주의적인 성격이었다.

이런데서 아내를 지배하고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아내는 자신의 열등감을 자존심으로 버티며

겉으로는 복종하면서도 음은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고자

공부도 잘 하고 예쁜 자기 딸에게 온통 자신의 사랑을 쏟아부었다.

딸에 대한 과잉보호로써 자신이 못다한 것을 채워주는

또 다른 자신으로 그녀를 동일시하였다.


아이는 엄마만 붙어다녔다.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는

딸의 응석을 받고 싶었지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참다 못해 때로는 이것이 어머니가 싸고 도는 일이라 생각되어

어머니와 딸에게 아무 일도 아닌데도 화를 내곤 하였다.

이럴때면 딸은 아버지를 더 무서워하고, 또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아빠를 더욱 경계하고 멀리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이 아빠와 같이 다니는 것을 보면

자신도 아빠의 사랑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엄마가 이를 알면 야단칠 것 같고,

또 아빠가 무서워 도저히 자신이 없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빠를 사랑하고 싶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접근도, 시도도 못 해 보는 딸의 첫번째 짝사랑인 것이다.


어느덧 자신은 아빠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며,

성장해 가면서 이러한 평가는 다른 남성에게까지 확대되어간다.

그래서 나는 어떤 남자의 사랑도 받을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간주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도 모르게 어떤 한 사람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맘이 설레고 늘 그 사람 생각에만 빠지게 된다.

이를 억누르고 잊어 보려고 해도 그런 생각은 더 강하게 밀려 온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만 애태우는 짝사랑인 것이다.

자신의 지도 교수를 혼자만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학생은 어려서 받은 그 짝사랑의 상처를

회복하고 싶어 하면서도 다시금 반복하고 있었다.

많은 점에서 그 교수는 아빠와 유사했 다.


학벌이나 지위도 비슷하고, 아빠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욱이 권위주의적이고 독선적인 면까지 닮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로서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인정해 주고 친절히 가르친 것 밖에는 없었지만,

학생은 늘 아빠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버지와 닮은 사람이, 조금이나마 자신을 인정해 준 것을 고마워하게 되고,

그 고마움은 첫 번째 짝사랑을 다시 보상시켜 보려는 제2의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제대로 접근하지도 못하나

아버지와 같은 사람에게서 이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

그간 속에 억눌렸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 교수님께 터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의 인정만으로 사랑의 두려움이 결코 걷혀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초조하다.

'과연 나같은 사람이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을까' 하며 두려워하며 망설인다.

혹 아버지처럼 갑자기 자기를 야단치며 멀리하지 않을까 조마조마 해 한다.

물론 이러한 마음은 대부분 무의식적인 과정이며

본인은 이를 직접 느끼지 못하고 그냥 괴로워한다.


이 불안한 마음이 결국 이룰 수 없는 짝사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과거 사랑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온 자신이 겨우 사랑을 해 보았지만

결국 혼자만 애태우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즉 '나는 이런 식의 사랑밖에 할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하며

자신을 더 낮게 평가하고 질책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쩌다 생긴 짝사랑이 아니라 필연적인 짝사랑이기도 하다.


짝사랑은 결국 사랑에 대한 심한 두려움과 열등감 및 낮은 자존감(self-esteem)에서 출발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만 정상적인 사랑을 할 자신이 없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한 남학생의 얘기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짝사랑 한 경우인데,

대개 남학생의 경우는 자기가 짝사랑하고 있다고

과감하게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딱지를 맞더라도 계속 따라 다닌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전혀 마음을 열지 않고 아주 차갑게 대한다.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너무 고통스럽다고 하며 외래를 찾은 경우였다.


그의 어머니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완벽주의적인 어머니 역시 대개 자식을 과잉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완벽한 생각대로 아들이 따라 주기를 바란다.


어린아이, 실수할 수 있는 아이,

넘어질 수 있는 아이를 인정 하지 않고 항상 더욱 완벽한 것을 요구한다.

계속 어머니의 요구대로 따라가려 하나 항상 부족하고 못 미친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잘 했다고 인정받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


이것이 결국 하나의 짝사랑 형태로 경험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지만 결코 나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부족한 남자로 자신을 평가하고 결정하게 된다.


이 짝사랑의 상처가 다시 대학 생활에서 터졌다.

같은 서클에서 여러 남학생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그 여학생에게 터진 것이다.

이 여학생 역시 강하고 완벽해 보였다.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예쁘고,

서클 일도 아주 잘 해서 모든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

남자들의 관심을 잃지 않고자 모든 남자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준다.


여기에서 그 남학생은 그리던 어머니의 사랑을 잠시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접근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 다시 접근하고 싶지만 두렵고 자신 없는 마음이

그 여학생에 대한 짝사랑으로 표출되고 만 것이다.

앞의 여학생과 거의 같은 마음이다.


인간에게서 사랑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면서도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이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오실 만큼

사랑의 회복과 완성은 중요한 것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이면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주어지는 것으로만 받아들일 뿐

그 이상의 노력과 발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의 일회적인 단면만을 생각한다.

사랑도 인간의 다른 부분처럼,

몸과 지식처럼 성장하고 발달하는 것임을 잊는다.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상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 - 개인적 경험 이전에

실락원의 버림받은 경험에서 오는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두려움 - 을 가진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고 받아 주고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해

인간 모두가 두려움을 가지며 태어난다.


생후 따뜻한 부모의 사랑은 이러한 두려움과 불신을 치료해 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랑은 나를 받아주고 이해해 주는 상대를 만날 때 가능한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 경험되면 사랑의 실험과 훈련은 점차 확산되어 간다.

형제, 친구, 학교 선생님, 그리고 사회, 애인, 배우자에게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되어 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앞의 경우에서처럼 부모의 이해와 사랑이

부족하고 잘못된 경우에는 인간은 여전히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짝사랑의 아픈 상처만 남게 되며 그 이후 사람을 만나며

사랑하는 일에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하지 못하고 받지 못하니

더욱 사랑에 대한 욕구가 솟구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에 도전하고 실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짝사랑이다.


짝사랑은 결코 완성된, 훌륭한 사랑의 형태는 아니다.

한쪽만의 미완성의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의 성장을 위해서는 무척 중요한 실험이요 연습이다.

물론 연습이기에는 너무도 고통이 크지만

고통이 큰 만큼 인간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어린아이가 기어다니다 겨우 일어나서

한 발자국씩 떼어보는 그런 미숙한 사랑이다.

그러나 기어다니는 것보다는 휠씬 성장한 모습이다.

즉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보다는 휠씬 성장하고 훌륭한 모습이다.


사랑이 뭔지 모르고 마음을 서로 닫은

기계적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보다는 훨씬 성장한 모습이다.

더 완전한 사랑,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사랑의 과정인 것이다.


짝사랑으로 고민하며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실망을 말아야 할 것이다.

혹시 주위에 이런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을 어린 사람,

철없는 사람으로 몰아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격려하고 더 넘어지지 않게 잡아 주어야 한다.

그 사람이 홀로 서서 걸어다닐 수 있을 때는 결코 짝사랑을 안 할 것이기 때문에

짝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걷기도 전에 뛰는 사람이 없듯이, 짝사랑 없이는 성숙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과의 만남 역시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만남 역시 발전되어야 한다.


짝사랑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에게까지 그 사랑을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즉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그저 멀리서만 그리워하고 쳐다만 볼 뿐

그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짝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를 꿈꾸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랑이 진짜 사랑으로 발전될 즈음이면

배척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중되어 더욱 도망가는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고

그저 교회 근처를 맴돌거나 교회에 와서도 복음의 핵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피곤하게 봉사만 하며 다니는 출석 교인이 되기 쉽다.


사랑에 대한 두려움과 짝사랑의 상처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으신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지 그 사람의 사랑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회복시켜서 마음을 열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서서히 일어난다.


예수님을 만나가는 과정이 바로 사랑의 두려움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결코 과거에 경험한 짝사랑의 대상처럼

우리를 차갑게 물리치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만은 우리를 어떤 경우에도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의 짝사랑에 대한 치료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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