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신데렐라의 불안

007 RAMBO 2017. 8. 18. 17:54

인간이면 누구나 신데렐라의 멋진 사랑을 한번쯤 꿈꾸어 본다.

물론 커가면서는 다소 쑥스러운 얘기로 돌려버리기는 하지만,

우리의 어느 마음 한구석에는 이러한 꿈이 여전히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크면 이런 남성을, 이런 여성을 만나 결혼해야지!’ 하고 생각하며,

비록 신데렐라의 왕자님 같은 분은 아닐지라도

자신에 맞는 나름대로의 왕자님과 공주님을 꿈꾸며 산다.


‘키도 크고 근사하고 이해심이 많은 남자,

거기에다 직장도 안정되고 근면 성실한 남자, 가정을 아끼는 남자.’

‘얼굴도 예쁘고 가정적인 여자,

직장일에 시달린 남편을 늘 따뜻하게 맞아 줄 수 있는 푸근한 여자,

기왕이면 일류 대학까지 나와 지성미도 있었으면!’


결코 허황된 꿈만은 아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꿈을 믿기에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꿈꾸며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날 꿈꾸던 왕자님과 공주님이 눈 앞에 나타니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극적으로, 혹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된다.

드디어 신데렐라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꿈이 이루어진 다음 부터이다.

신데렐라는 동화이다.

마지막 장면이 그 꿈이 이루어진 결혼식일 뿐 그 이후의 얘기는 없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동화가 아니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신데렐라는 어떻게 살았을까? 계속 꿈처럼 행복하게 살았을까?

처음처럼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럭저럭 그 속에서 잘 살았을까?

아니면 어떤 문제가 있어 궁궐을 도망쳐 나왔을 까?

신데렐라의 속편이 없기에 무척 궁금하다.

이제 우리 각자가 신데렐라의 속편을 상상해 본다면 무척 홍미로울 것 같다.


신데렐라가 고아이고 하녀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수근거릴지 모른다.

감히 왕자님 앞에서야 아무 얘기도 못하겠지만

조금만 실수해도 아마 신분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총 이전에 자기 스스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까?


"내가 어떻게 왕자님 같은 분을 모시고 평생 살지?”

하루 이틀은 흥분해서 잊어 버렸지만,

현실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만 같은 왕자님과 궁궐의 생활을 잃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해서 열심히 살 것이다.


누가 자기의 과거를 들추어 내지 않도록,

스스로도 왕자님의 수준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을 것이다.

동물들과 즐겁게 어울려 노래부르던 일도 삼가하고

늘 완전한 생활을 하기 위해 긴장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밝고 천진스러운 모습은 없어지고

뭔가 어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신데렐라의 마음 깊은 곳에는 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을 해결해 보고자 여러 방법으로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신데렐라는 이러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살았을까? 몇 가지 가능한 방법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왕자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하는 방법이다.

흔히 하는 얘기로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라는 말처럼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남편에 복종하는 경우이다.

자신은 완전히 없어지고 왕자님의 또다른 분신처럼 그에게 몰입해서 사는 것이다.


이런 부부관계가 드물지 않게 있다.

강한 유교적인 문화권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사회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전한 남편,

나이 차이가 많은 아버지 같은 남편과 같이 사는 부인에게서 이런 관계가 많다.


이들은 일생에 남편의 말에 반발해 보거나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사실 그들은 부부라기 보다는 남편이 하나의 우상으로서 존재한다.


몇 년 전 간염과 우울증으로 입원한 가정주부가 있었다.

하늘 같은 남편이 과로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리 심각한 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인은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며

며칠 밤 을 새면서 간호를 하다 후에 자신이 이런 병을 얻고 말았다.


그 남편에게 조금의 변화만 있어도 불안해 하며 당황하는 것이 그 부인의 모습이었다.

부부애가 많아서, 사랑이 너무 깊어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심해 보였다.

자신의 우상이 허물어진 듯했다. 자아가 없는 맹목적인 복종과 몰입이었다.


두 번째의 신데렐라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흥분하였던 결혼식과 신혼 여행도 끝나고 점차 왕자님의 생활을 지켜 보게 되었다.

항상 바쁘게 여러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는 분임을 알게 되었고,

그 주변에는 자기보다 예쁜 궁녀들과 귀족 출신의 여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느끼게 되는 동시에

왕자님이 바쁜 생활로 인해 자신에게 점점 소홀해 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데렐라는 왕자님의 사랑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사랑과 관심이 식은 것이 아닐까?

혹시 주위의 딴 여인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신분이 낮고 궁궐에서 자주 실수하는 것을 알고 한심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저런 염려와 불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도 한심한 생각이 들어 때로는 말을 하기가 싫어질 때도 있었다.


왕자님은 예전처럼 신데렐라가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을 한다.

왜 그러냐고 묻지만 신데렐라는 입을 꼭 다문다.

얌전하고 순종적인 줄 알았던 신데렐라가 때때로 신경질을 내고 바가지를 긁기도 한다.

신데렐라는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아 불안해 진다.


많은 부부 싸움이 이러한 데서 출발된다. 상대방이 변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변했다고 원망하고 미워한다.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의 자신감, 자존심이 먼저 변해서 상대방을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계속 이런 관계가 되면 남편도 지치게 된다.


사랑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사랑을 줄 수 있지,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일지라도 계속 신경질만 내고 있으면

남편은 아마 언젠가는 싫증을 내거나 자신의 결혼을 후회하게 될 지 모른다.


이렇게 신데렐라는 사랑을 요구하면서도

사랑 받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으니 왕자님도 무척 난처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상대가 자기를 싫어하게 해서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유도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낮은 자존심과 열등감 때문에

이 고귀한 남편과 사는 것이 불안하고 괴로워

자기를 버려 주었으면 하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짜 자신을 버리는 말이나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 매우 분노한다.


남편들은 부인이 너무 바가지를 긁으면 술을 마시게 되고

가능한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살짝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어쩌다 외박을 한다든지, 옷에 입술 연지라도 묻혀 오는 날이면 더 야단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편의 이러한 행동은 합리화될 수는 없겠지만,

부인의 마음에만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참 복잡한 마음임에는 틀림없다.


세 번째로 신데렐라가 취했을 태도는 어떤 것일까?

아마 신데렐라는 겉으로는 아무 변화 없이 열심히 가정 생활을 했을지 모른다.

왕자님을 뒷바라지하고 순종적인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님을 향한 마음은 뭔가 예전처럼 밝지 않고 어두웠을지 모른다.

대신 자녀를 키우고 집안을 꾸미고 화초를 가꾸는 일들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였을 것이다.


이 경우는 첫 번째처럼 절대적 복종 관계도, 두 번째처럼 의심하는 관계도 아니다.

겉으로는 이무 문제가 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복종하고 가정 생활을 열심히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과 마음은 상대방에게 주지 않는다.


겉마음은 열심히 주고 희생하지만

속마음은 굳게 닫혀지고 이미 그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다.

상대방이 싫어서 마음을 주지 못하기 보다는 열등감 때문에

'나의 모든 마음을 다 주었다가 혹시 배척이나 버림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마음을 전부 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러한 배척의 위험성이 적은,

자신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을 택하여 사랑하는데,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자식이 된다.

이 경우는 틀림없이 과잉보호의 양육이 된다.

물론 이러한 무의식적 과정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이러한 일이 진행된다.


부인의 닫혀진 마음을 남편이 눈치채거나,

자식이 너무 어머니 주위에서만 멤도는 것을 아는 남편은

다른 엉뚱한 일로 화를 낸다.

그러면 부인은 아주 섭섭해 한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 자식과 집안 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저렇게 화를 내다니!’


때로는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자신이 남편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식도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부인의 마음은 더욱 굳게 닫혀진다.


물론 겉으로는 부부간의 문제가 전혀 없이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주고 있던 자식이 성장하면서

이 자식도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알기 시작할 때

새로운 위기와 좌절이 시작된다.


어떠한 경우이든 자신의 속마음을 주었던 대상이 자기를 떠날 때

그 사람은 심한 분노와 함께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자식이든 누구든 인간은 떠나고 배신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다.


이런 경우는 사람이 아닌 것들에 다시 몰입하는 것으로 이를 극복해 보려고 한다.

부동산, 증권, 화초 가꾸기 등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어떠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일들을 벌여본다.


때로는 성공을 해서 물질과 명예로써 자신의 문제를 보상하기도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허전함과 혹시 이 물질과 명예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여전하다.


네 번째로 신데렐라가 취했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녀는 결혼 초기에는 즐겁고 희망에 찬 궁궐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이 노출되고 드러나면서

그녀의 불안과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 힘든 생활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을 것 같게 되자

어느 날 신데렐라는 아무도 모르게 궁궐을 빠져 나와

과거에 자신이 마음껏 동물들과 뛰놀던 숲 속으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신데렐라의 심정이 우리의 삶 기운데 어떻게 일어날까?

소위 말하는 바람을 피우고 싶은 마음으로 나타난다.

바람을 피우는 행동은 어떠한 심리적 동기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서 구체적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러한 성향이 내재된 경우는 적지 않다.


안방 극장의 인기 드라마의 대부분이 이러한 불륜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매번 신문에서 저질 프로라고 공격을 당하면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왜 우리는 남의 스캔들에 관해서 그토록 열을 올리며 얘기할까?


이것은 이미 우리 속에도 이러한 욕구를 의식으로 느끼지 못할 뿐

이러한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행위를 간접적이고 합법적으로

경험하고 즐기는 방법으로 이를 보고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동기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심리적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면이 완벽해서

대하기가 어려운 남편이나 자존심이 강하고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는 아내보다는

부족하고 허술하지만 쉽게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중요한 동기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바람은 어떠한 객관적인 조건보다는

편안하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


그래서 훌륭한 남편이나 완벽한 부인이 이를 보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신데렐라의 불안은 비단 인간 관계에서만 일어 나는 현상은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자녀로서, 신부로서 초대받은 신앙인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깨어난 후

자기 자신의 죄인됨과 연약함을 진정으로 알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풍성하심을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신데렐라와 같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불안을 어떻게 감추며 살아가고 있을까?


첫 번째 경우처럼 하나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으로 무조건 믿고 있지는 않은지!

참 좋은 신앙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더욱 성숙된 신앙을 원하신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원망하며

늘 염려하는 신앙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은지!


세 번째의 경우처럼 겉으로는 열심히 믿으면서

속으로는 세상의 물질이나 가족들을 더 믿으며 살고 있지 않은지!


마지막의 경우처럼 아주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지?


이러한 문제는 결국 자신의 열등감으로 인해

그 대상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의 열등감을 내놓고 사랑을 고백하기에는

아직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열등한 것을 다 내놓고 보였을 때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혹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의심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가난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가난하고 열등한 나의 모습이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항상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변함 없는 사랑을 믿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은혜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풍요함과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로써 인간 관계의 열등감과 불안에서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성훈 <사랑하는 마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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