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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입맛

007 RAMBO 2022. 4. 1. 22:22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기분이 팩 상했다. 
 
"마트에서 초밥을 사다 먹었는데 제법 먹을만 하더라."
 
"마트에서 파는 초밥을 어떻게 먹니? 나는 못 먹겠던데."
 
전화를 팍 끊어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이런 애랑 십년 넘게 친구로 지내는 나도 참 착하지.
 
 
 
오래 전에 애들 데리고 캐나다에 잠깐 가서 살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구역예배를 보러 갔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여자분들이 모두 럭셔리한 삶을 사시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현지 변호사 사모님, 한 분은 유학 온 아들을 데리고 있던 검사 와이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급하게 그곳에서 필요한 가구를 이케아에서 주문을 했었다. 
 
"이케아 가구도 쓸만하던데요."
 
이런 내 말에 대한 두 분의 반응이 참....
 
"이케아 가구? 못 쓰겠던데?"
 
"아유, 그딴 걸 어떻게 써요?"
 
아니, 말들을 그렇게 밖에 못하시나? 열 받는데 억지로 웃고 있느라 참 힘들었다. 
 
 
 
이 두 가지 일화로 알 수 있듯이 나는 다른 여자들에 비해 입맛이나 취향이 좀 싸구려이다. 
 
이유는 아마도 어릴 때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싸구려에 길들여져서 싸구려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온 것 같다. 
 
고급한 걸 먹어보거나 누려보지 못해서 그런지 그게 좋다는 걸 잘 모른다. 
 
 
 
한때 그게 부끄러웠던 시절도 있었다. 
 
나이가 들고 어릴 때부터 부유하게 자라온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과 나의 취향이 상당히 달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몇 번 있었다. 
 
그때는 젊어서 그런 나의 취향을 부끄러워하면서 감췄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 나의 싸구려 입맛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친구들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니
 
그들이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더 가난을 두려워할까, 가난을 경험해 본 사람이 가난을 더 두려워할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가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가난을 매우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역시 가난이 싫지만 나는 가난을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어릴 때 실컷 경험해 봤고, 그게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게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싫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고, 나름 그런 삶에서도 얻는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런데 가난을 모르는 친구들은 자신이 가난해진다는 상상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가난을 몹시 두려워하고 절대로 그런 지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산다. 
 
 
 
뭐든 두려워한다는 건 괴로운 법이다. 
 
두려워하는 게 많을수록 부자유한 삶이다. 
 
마트에서 파는 초밥이나 이케아 가구를 사용하는 삶에 대한 경멸과 두려움.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삶이 내게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해야 하는 삶, 그건 노예의 삶이나 마찬가지다. 육신의 노예.
 
마치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둥둥 떠있지만 물밑에서는 바쁘게 다리를 움직여야 하는 백조처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의 싸구려 입맛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애쓸 시간이 줄어드니
 
그 시간에 진짜 주인을 조금이라도 더 잘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 resident ali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