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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훈련에 무지하다

007 RAMBO 2014. 7. 15. 22:13

기도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면 누구나 새 신자 반에 들어가

기독교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배우며

신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정규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분들도 적지 않지만,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성경과 기도로서 만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도구인데 반해,

기도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네 교회에서는 기도회는 적지 않지만

기도훈련을 제대로 시키는 데는 별로 없다.

그냥 기도를 열심히 하면 되지 무슨 훈련이 필요하냐는 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적인 눈을 떠서 영적 통로로 나아가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면

기도는 그야말로 주문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정작 응답은커녕 성경에서 약속한 은사를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 처지인데도 목회자들은

새벽기도회를 비롯한 기도회에 나오라고 성화를 댈 뿐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훈련에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들도 기도훈련에 대한 체험이 없거나

필요성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평신도 20여년의 세월동안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교단의 교회를 다녔다.

그 교회는 새벽기도회는 물론 저녁기도회도 매일처럼 있었다.

게다가 필자가 오랫동안 섬겼던 교회학교는

주일예배가 끝난 오후에 기도회를 마쳐야 귀가할 수 있었다.

구역에도 기도회는 수시로 열렸으며 기도원을 찾아 기도하는 것도 예사였다.

 

그렇지만 필자는 평신도시절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기도는 그럭저럭 한다고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신앙은 힘이 없었고 삶은 시련과 고난의 반복이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서도 목회지로 가지 않고 세상으로 도로 나갔던 필자는

7년여가 흐른 후에 사역을 결심했다.

그리고는 교회의 관행이 아닌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신앙을 지킬 것을 다짐했다.

여기에 기도는 핵심사항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훈련을 시작으로 사역을 병행해나갔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필자는 적지 않은 세월을 거쳐

하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은혜를 얻게 되었다.

많은 은사도 경험했고 하나님의 도우심도 엄청나게 받았다.

 

그 시작은 철저한 기도훈련 끝에 경건의 습관을 몸에 밴 덕분이다.

그래서 필자는 멘토링을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

기도훈련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를 찾는 제자들은 새 신자가 아니라

신앙연륜이 제법 오래된 집사나 권사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기도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기도행위는 오랫동안 반복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도에 대해 무지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과학적인 실험으로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영적인 일은 영적인 눈을 가져야

비로소 영적인 세계가 열린다.

 

눈만 감고 있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뜨거운 찬양과 더불어 걸쭉한 목소리의 기도 인도자가

집회분위기를 달궈놓은 상태에서

감정이 격앙된 상태가 성령충만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감정적인 느낌일 뿐이다.

 

기도의 수신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듣고 있어야 기도인 셈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듣고 있는 지 상관없이 요청만 하다가

기도를 끝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기도할 때 드는 갖가지 생각과 느낌이

전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잣대와 분별력이 없다면

이를 오해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이다.

이 역시 기도훈련이 안된 탓이다.

 

그러다보니 비성경적인 은사주의자가 되거나 신비주의자가 되어

생명과 영혼이 위태로지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기도를 열심히 할수록 더욱 벼랑 끝에 몰리는 형국이다.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라면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악한 영이 넣어주거나 자신의 느낌일 수밖에 없지만,

제대로 된 기도훈련을 받지 못했기에 이에 무지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기도의 위력을 가볍게 여긴다.

성경은 기도의 위력에 대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엄청나게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9)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7:7)

 

이러한 예수님의 말들은 놀라운 기도의 위력을 명쾌하게 말씀하고 있다.

에둘러 말씀하시지 않고 너무 직접적으로 말씀하셔서 읽는 우리가 당황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실 만한 말씀정도로 받아들이고 만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니까 그런 놀라운 말씀을 하실지 몰라도,

이 땅에 사는 우리들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믿음 없는 생각을 교회 내에서는 드러내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도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다.

과거의 기도경험에 응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경에 밝히신 기도의 응답은

무조건 우리가 요청하는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유효하다고 하셨지만,

들을 귀가 없는 우리로서는 그냥 기도응답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만다.

 

어쨌든 그동안의 기도경험에서 얻어낸 학습효과는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오는 일은 실로 어렵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더라도

기도의 위력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크리스천들이 기도의 위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되는 원인으로 이어진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데 누가 간절하게 기도하겠는가?

 

세상의 일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되기에 부정할 수 없지만,

영적인 일들은 영적인 눈을 가져야 비로소 보게 되고 깨닫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 맹인이 눈을 뜨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람조차

이를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가 역력했다.

 

하물며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성경의 기록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눈을 갖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영적인 세계가 가까이 보이고 영적 능력을 더 많이 얻게 되지만,

하나님과 멀어지면 질수록 갖고 있는 믿음조차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형식적인 신앙행위를 반복하는 종교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탐욕과 방탕이 빼곡히 들어찬 세속적인 사고로 물든 사람이라면

오랜 신앙의 경륜에도 영적인 눈을 가질 수 없고

기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없다.

 

세상의 지식과 경험에서 받아들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측정하고 믿음을 재단하려든다.

 

그런 이들에게 놀라운 기도의 위력은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신앙의 모습일 뿐이다.

 

 


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