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평신도에 해당하는 lay, laity는
‘전문적이지 않은’, ‘서툰’ 등의 부정적 의미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목사가 아닌’ 혹은 ‘직분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어원이 되는 헬라어
라오스(laos)는 이런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경에서 라오스는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모두 라오스입니다.
목사건 평신도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목사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단어에 대응하는 히브리어는 암(am)입니다.
구약에서 암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방인에 해당하는 고임(goim)과 대비됩니다.
언약 백성과 언약 밖의 백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라오스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진 존재임을 뜻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백성(laos)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laos)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도 평신도도
모두 라오스입니다.
라오스를 평신도로 번역했으니,
모두 다 평신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중 clergy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헬라어 클레이로스(kleiros)이고,
그 뜻은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이 없는 성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클레이로스입니다.
번역을 따라가자면 목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목사와 평신도가
아무런 구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은사와 직분에 따라 각기 다른 부르심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곳이고,
목사는 교회를 이끌고, 가르치고, 위로하며 선포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성도들은 그에 상응하는 존경과 순종으로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오늘날과 같은 목사와 평신도의 구분은
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전통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그 폐단도 누적되었습니다.
전통이라는 껍데기가 견고해지고,
본질은 뒷전이 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은 목사 뒤에 숨어서 ‘시키는 대로’ 할뿐,
‘마음을 다하여’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 한 것’으로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자발성이 결여되었으니 진정성도 부족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 따위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목사 정도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은 이론일 뿐,
실제로는 ‘시키는 대로 하는’ 행위로 구원 얻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목사를 무대 위에 세워 둔 배우와 같이 대합니다.
예배에 참석하지만 예배의 일부가 되기보다
예배를 구경하고 비평하는 비평가 행세를 합니다.
많은 목사들의 설교와 행태를 비교하고 판단하며, 교
회와 교계에 관한 자잘한 지식을 자랑하면서 ‘교회꾼’으로 처세합니다.
이런 이들이 장로가 되어 평신도의 모범인양 행동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으며,
수준의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100%의 마음과 목숨과 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만들어온 전통이나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신학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습니다.
반기독교적인 교리들도 교회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종교다원주의나 젠더 이념 같은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런 이들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거부하는 젠더 이념도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동성애 축제에 버젓이 신학교의 이름으로 참여하기도 합니다.
혹은 복음의 교리를 왜곡하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위험한 교리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영접기도를 한번 하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천국에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거룩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구원의 완성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거룩함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여정을 가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도,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매우 위험합니다.
위기에 처한 오늘날의 교회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큰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평신도들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핍박이 증가되어 예배당에 모여 예배 드리기가 어려워질 때,
가정에서 은밀하게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은 평신도들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진동시키실 때
본질이 아닌 것들은 모두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히 12:27).”
목사와 평신도를 잘못 구분하던 전통도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 중에서,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해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이 유일한 가이드라인입니다.
(자유의집 주말 칼럼 정영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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