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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오해

007 RAMBO 2014. 5. 6. 01:45

 ‘기도’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이나 그 의식,

성도와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대화,

인간의 영혼이 진정으로 생명을 얻는 영혼의 호흡이자

영혼전체로 드리는 예배라고 쓰여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기도행위는 무엇인가?

대부분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기도나 통성기도의 장소에서 듣게 되는 기도는

자신들이 소원하는 바를 간절히 요청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물론 소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간구는 기도의 주요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대부분 잊고 지낸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요청하면서

기도와 간구를 떼어놓았다.

기도는 간구를 포함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함축하고 있었기에

간절히 요청하는 간구를 떼어내어 구별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기도의 대부분은 간구로 채워지며

다른 요소인 찬송이나 감사는 간구를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

기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기도는 점차 전투적이고 희생적으로 변한다.

 

일천번제는 일천일 기도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무속인들이 즐겨하는 백일기도나 천일기도처럼 일천번제 기도회가 교회마다 성행하고 있고,

특별새벽기도회는 새벽기도를 습관화하는 목적이라기보다

특정한 목적달성을 위한 기도응답의 기회처럼 여겨진다.

 

또한 일반적인 기도보다 희생적인 요소가 강한 새벽기도나 철야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여겨지고,

그보다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금식기도가 우위를 차지한다.

물론 금식하는 일수가 많아진다면 기도응답을 받을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희생의 강도를 더한다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거라는 생각은

성경적이 아니라 기복신앙을 내세우는 무속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교회에서는 기도응답이나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거액의 헌금을 포함한 희생적인 기도를 해야 효과가 큰 것처럼 부추기고 있으며,

 대부분의 성도들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어

이 같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기도하기만 하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위의 구절을 비롯해서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응답을 받을 것이라 확신하며 기도한다.

이것을 의심치 않고 굳게 믿는 것이 기도응답을 얻어내는 견고한 믿음이라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믿고 기도한 사람들이 전부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니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기도하면 할수록 실망스럽고 낙담이 크다.

 

기도응답에 대해 성경 전체에 걸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단지 기도의 형식으로 무엇이든 요청만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희생의 강도를 더할수록 응답받을 확률이 큰 것도 아니다.

 

이는 성경의 일부가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인 양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곡해해서 가르치는 자들에게 배우거나

성경의 참뜻을 모르거나 오해하기에 비롯된 것이다.

기도란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모습이다.

위에서 밝힌 기도의 사전적인 정의처럼, 기도는 응답을 위한 요청만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녀와의 깊은 교제나 친밀한 대화이며

생명을 얻는 영혼의 호흡이다.

 

사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우리가 말로 일일이 밝혀야만 필요사항을 아시는 것은 아니다.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읽으셔서 다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구절절이 밝히지 않아도 주시고 싶다면 지체 없이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간절히 주시기를 기대하며

이른 새벽부터 시린 교회의자에 꿇어앉아 기도해오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아님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일까? 기도가

오래될수록 머리만 혼란스러워진다.

부모와 담을 쌓고 명절에 왕래조차 하지 않고 지내던 아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재산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싸늘한 부모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모의 거절에 더욱 악을 쓰며 험악한 표정으로 떼를 쓴다면

신변에 위협을 느낀 노부모는 아마 경찰을 부를지도 모른다.

 

부모가 어떻게 지내는지,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는지,

드시는 것은 부족하지 않은지 관심조차 없다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얻어낼 필요를 느껴서야 비로소 찾아와서

다짜고짜 요청하는 행위는 가슴 뭉클한 감동은 고사하고

뻔뻔하고 이기적인 속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이 헌신적인 부모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자녀가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무조건 주실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속내를 날카롭게 읽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이다.

어쩌면 이러한 친밀한 교제가 간구하고 요청하는 행위보다

기도의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부자 아버지로만 여기고

자신이 필요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자녀인 우리가 알아주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다.

그래서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으며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와 십자가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같이 먹고 마시며

희로애락을 함께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무얼 말씀하시는 것인지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귐의 시간이

기도의 많은 시간으로 할애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혼이

함께 만나고 호흡하며 느끼는 시간들이 오래될수록

하나님에 대해 더욱 알게 되며 그분을 자세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히 그분의 뜻을 기뻐하며 좇아 살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분의 종으로 기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과 깊게 사귀고 싶어 한다면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여야한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이 생겼다면 늘 붙어있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주말이면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퇴근시간이 무섭게 찾아가고,

틈틈이 전화며 시도 때도 없이 메일을 주고받으며

컴퓨터에도 메신저로 끊임없는 대화를 나눌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도 이와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새벽기도라도 다니고 있다면 제법 기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오산이다.

 

하루에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을 대화한다면

깊이 교제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남녀 간의 교제는 본능적으로 시작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은 습관을 들여야 하는 것이 다르다.

 

그렇지만 본능을 좇아 사귀는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지만

습관으로 몸에 밴 하나님과의 교제는 평생 없어지지 않는다.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견고하게 몸에 붙게 될 것이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