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100 %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눈물까지 흘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보시다 못해 차라리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시는 자리에까지 가신 것입니다.
어느 분이 신앙이 깊으시다는 것은
그 분의 심령이 예수님의 심령을 더욱 닮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머리로는 많이 알면서도
옆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결코 예수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사람은 결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신학에 정통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앙이 깊어질 수 있습니까?”
하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즉, “어떻게 해야 심령이 예수님을 닮아서 따뜻해 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제 심령이 변화되어
주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습니까?”
하는 의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오늘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크리스챤이 겪게 되는 슬픔의 의미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 세상을 40년 이상 살아 보신 분들은
“어떻게 해야 심령이 변화되어 주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가?”
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아십니다.
고생을 해 봐야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봐야 합니다.
세상 말에도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 봐야 한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길러 봐야 한다,”
“삼수를 해 봐야 인생을 안다”고 합니다.
물론, 요지는 군복무 여부가 아닙니다.
출산양육 여부가 아닙니다.
삼수를 해 보셨어도 좋고 안 해 보셨어도 상관 없습니다.
요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고생을 해 봤냐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봤냐는 것입니다..
고생을 해 봐야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알고
인생을 안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던 요셉이
옥살이와 노예생활을 통해 성숙해서
용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보지 못하고
교리가 틀린 사람들은 다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 섰던 바울이
죽을 고비를 몇번이나 넘기는 시련을 통해 성숙해서
사랑 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썼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성숙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성숙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그 심정이 눈물 젖은 예수님의 심정을 닮아
따뜻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고
그들은 돕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챤들에게 주어지는
슬픔의 의미입니다.
다같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슬프면서 동시에 원망하고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깊은 슬픔 중에는 남을 더욱 용서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카타르시스라는 용어도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슬픔 중에는 용서까지도 하게 되는데
슬픔에 잠겨서 거짓말 하고 남을 속일 궁리를 하는 것이 가능 합니까?
불가능 합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이 도둑질 할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 합니까?
오히려 반대로 깊은 슬픔 중에는 욕심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슬픔에 잠긴 사람이
음란한 생각을 즐기는 것은 더욱 불가능 합니다.
슬픔에 잠긴 사람이 교만한 것도 더더욱이 불가능 합니다.
오히려 슬픔에 잠기게 되면 겸손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무릅꿇고
기도하러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슬픔에 찬 분들이십니다.
특히 평소에 안 보이시다가 갑자기 나오시는 분들은
틀림 없이 슬픔에 찬 분들이십니다.
그렇게 슬픈 상태에서는 마음이 정화 되기 때문에,
회개는 슬픈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기뻐 뛰면서 회개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서 회개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못 보셨을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회개는 엄청나게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도 그렇게 슬픈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슬픔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끔찍히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슬픔을 허락 하시는 이유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 신앙이 성숙해서
예수님을 더욱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슬픈 분이시기에
슬퍼보지 않고 예수님을 이해하기는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극히 슬픈 분이시라는 것이 생소하실 것입니다.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부모의 심정처럼
항상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갇히고
나그네 된 사람들을 향하시다보니 슬프신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항상 느끼시다보니 슬프신 것입니다.
아흔아홉마리의 온전한 양들이 있더라도
한마리의 잃은 양 때문에 근심하는 참 목자의 심정이 있으시다보니
지옥으로 브레이크 터진 열차처럼 달려가는 영혼들 때문에
너무나도 슬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신 분들의 간증들에 의하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슬픔에 차신—슬픔 충만하신—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영혼들이 지옥으로 달려가니 슬프지 않을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니 슬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슬프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슬픔은 불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3절에서는
예수님을 슬픔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에서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A man of sorrows, who is acquainted with grief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슬픔의 사람이라고 표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 생활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눈물 젖은 빵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삼대 의인 중 하나로 뽑을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겔 14:14, 2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인생의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드듸어 눈물 젖은 빵을 먹이십니다.
욥이 환란이 시작 되면서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하나님을 경배 합니다 (욥 1:20 – 21).
즉,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란이 끝날 즈음에도
“주께서는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욥 42:2)
라며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비록 비슷한 내용이지만 그 깊이는 다릅니다.
욥이 환난을 끝내면서 한 고백은
비록 그 내용이 비슷할 지라도
엄청난 시련을 통해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온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시련을 통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신앙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녀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기도했는데
왜 고난이 왔냐며 황당해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이쯤이면 그 고난이 왜 왔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게 해 달라고 기도 했기 때문에
그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눈물 젖은 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온 고난은
여러분이 빨리 성숙 하시는 것만이
그 고난을 빨리 끝내시는 길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털거려봤자
그 고난의 기간이 연장만 될 뿐입니다.
그렇게 온 고난은 어디가서 기도 받고 귀신 쫒고 예언 받아도
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난이 끝나 버리면
그 고난을 통한 “신앙 성숙”이라는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겸손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꾸준히 나아가는 것 만이,
그래서 신앙이 빨리 성숙 하시는 것 만이
그 고난 학교를 빨리 졸업하는 길입니다.
물론, 그 고통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고난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고통을 덜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통 중에 예수님께 나아 가시기 바랍니다.
한달 한달 월세 내시기도 힘드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집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별 인정을 못받는 일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그러한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해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난 잘못한 것도 없이 비참하게 죽었었기 때문에
억울한 것이 뭔지 이해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난 예루살렘에 온 그 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나무에 몇 시간을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수치가 무엇인지를 이해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슬픔을 이해 하십니다.
예수님께서man of sorrows, who is acquainted with grief,
즉 슬픔의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임하셔서
성숙한 경지의 신앙에 모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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