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기도할 때
적잖은 의문과 확신 사이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고민할 때가 꽤 많은 것으로 압니다.
내가 하는 기도가 과연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인지
아니면 나 혼자 착각하여 목소리만 높이며 부르짖는지
그 정체성에 대해서 적잖은 고민을 하는 것으로 압니다.
한참 지난 예전에 저도 교회 다니면서 믿음이 없을 때나
믿음이 조금 있을 때나
늘 이 기도를 주님이 들으시나 안 들으시나로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선포합니다.
울며 부르짖어 기도하라.
간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응답하신다.
구할 것을 두리뭉실하게 기도하지 말고
아주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그래서 내가 원하는 목록을 쫙 머릿속에 형상화 시켜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기도했고,
일천번제를 선포하셔서 매일 일천번제를 드릴 때마다
봉투에 10가지를 써넣으라고 하셨는데
10가지 모두 써넣어 그 봉투를 앞에 놓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도 뭔가 허망하다고나 해야 할까,
찝찝하다고 해야 할까,
이건 아닌데 하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기도하면서
계속 들기 시작합니다.
기도 내용은 순전히 저에 관한 기도였고
철저하게 기복신앙을 기본 베이스로 깔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며
그냥 순종하며 따라갔던 것입니다.
일천번제를 하게 된 계기는 찔래꽃 당신이란 책을 쓴
박00 여성 전도사님을 초빙하여 간증 강사로 세우셨고
"일천번제를 드리고 났더니 물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들어왔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의 축복이구나... 여러분들도
일천번제를 선포하고 저와 같은 축복을 누리십시오"
듣는 교인들은 열광했고
거의 열외 일명 없이 물질 복 기대의 확신에 사로잡혀
모두 일천번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본 사실이지만
그 전도사님은 일천 번제를 선포할 생각조차 없었는데
목사님이 강력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군요.
뭔 말이냐 하면...
대단히 큰 교회 건물을 신축하면서 무리한 대출로 인한
이자 부담도 힘들던 차에 작정헌금과 일천 번제를 목적으로
박00 전도사님께 부탁하여
그렇게 선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명하다고 하는 부흥강사들이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면
뭔 꼭 작정 헌금이다, 뭐다 하는 여러 가지 제목을 붙여서
늘 헌금을 강요했고 교인들은 빚이라도 내서 헌금하지 않으면
믿음이 적은 자로 낙인 찍힐까봐
힘들어도 눈치 봐 가면서 작정헌금을 했고,
교인들 스스로도 헌금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어렵지만, 강제로 카드빚이라도 내 가면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헌금이 적게 들어오면
목사님은 강대상에서 한마디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것인데 교회가 힘들어하는데
그냥 방관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주님 보시기에 예의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힘든 것은 알지만,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께 예물을 드린다면
여러분께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물질로 갚아 주실 걸 믿으십시오.
요전에 오셨던 박00 전도사님의 간증에서도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산 증인입니다."
목사님의 이런 선포를 분별하여 듣지 못하면
딱 속기 쉬운 언어유희의 극치를 보여주는
엄청난 울림이 있는 꽹과리 소리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이런 우스쾅스런
선포에 절대 걸려들지 않았을 것을요...
박00 전도사님이 물질 복 받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지,
그분의 어릴 때부터 살아온 배경과 주님을 어찌 섬겼는지,
자세한 내막을 안다면,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았다는 소리 함부로 못 합니다.
우리도 역시 그분과 같이 거듭난 후
엄청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각자 되돌아보면 전혀 그런 믿음의 삶도 아니면서
물질 복 받은 결과만 가지고 작정 헌금을 강요했고,
또 그 말을 들은 교인들도 얄팍한 생각으로
기회주의적인 헌금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허탄하기 짝이 없고,
미혹이 얼마나 사람의 눈과 귀를 가려서 어둠의 늪에
블랙홀처럼 빨려가게 하는지 한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큰돈을 벌어 물질의 청지기 역할을 충실히 하며
지금까지 믿음 생활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의 뒤에 있는 정확한 사실을 말하지 않고
물질 복 받아 돈을 엄청 벌었다는 결과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교묘하게 일반화시켜서 일천 번제만 하면
반드시 그렇게 큰 돈을 번다고 주입합니다.
이를 분별하여 다시 해석하면...
무당이 말하길 정성을 다하여 복비 두둑하게 내면
하늘이 감동하여 당신들에게
물질이 차고 넘치게 부어준다는 꿈같은 말씀입니다.
그냥 입은 옷만 다르고 직업만 다를 뿐,
그 속 사람은 나는 무당이니 무당의 말에 순종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복 받는다는 뜻입니다.
눈꺼풀을 하나 살짝 벗겨내기만 하면 바로 분별 되는데,
그동안 수많은 세상적 설교로 영적인 눈과 귀를 다 가려놔서,
마치 동화 속의 사나이가 피리 부는 대로
동내에 있던 모든 쥐떼들을 마법에 걸리게 하여
뒤를 따르게 하다가 전부 물에 빠져 익사하게 하는
동화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게 비단 저뿐만일까요?
이렇게 헌금만 하여도 쉽게 복 받는 비결이라면
중세시대 타락한 교황처럼 돈 받고 면죄부라도 팔아서
구원을 돈으로 사도록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헌금해서 복 받는다는 것과 교황이 돈받고 면죄부 팔아서
구원을 사게 하는 것이 뭔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 교회에서 성가대 할 때 40줄에 거의 근접한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결혼 문제로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말로 부탁하기 민망하여 A4 복사지에 글을 써서
작고 예쁜 편지봉투에 넣어 집에 가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매우 궁금하여 집에 가자마자 봉투를 뜯어 글을 읽어보니
알지도 못하는 배우자에 대해서
이런 남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목사님이 말하길...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배우자의 모습을 생각하여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준다는 것인데...
예전 어떤 자매가 그렇게 기도했더니
자기가 원하는 그런 사람(의사였다고 함)과 만나 행복하게 산다고
설교시간에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것입니다.
제게 기도를 부탁한 그 자매님도 그렇게 하기로 하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원하는 이상형을 적었습니다.
그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얼마나 당황했던지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대충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키 180 이상, 얼굴도 좀 되고, 목소리 좋고, 찬양 잘하고,
믿음 아주 좋고, 탄탄한 직업 소유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나이가 많으니
두세 살 어린 연하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해 달라는 내용을
글로 정성껏 써서 저에게 기도해 달라고 전달했던 것입니다.
(헉! 뭐야 이거, 나이만 빼고 다 내 얘기잔아... 농담입니다. ㅎ)
이거 모든 믿는 여성들의 로망인데...
근데 이런 퍼펙트한 남자가 존재하나?
저는 이 내용을 보는 순간
기도하고자 하는 생각이 확 사라져 버렸고
왠지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데로 주문 생산해 주는 업자일 뿐,
그 이상의 취급은 못 받으시나 보다...
참 슬펐습니다. 그래도 기도는 기도는 했습니다.
그녀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그 자매에게 합당한 형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이 기도가 내겐 그 자매님을 위한 최선의 기도였습니다.
위의 두 가지 예를 들었지만
두 경우에서 보듯 우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듯 입으로 부르짖고 작정 헌금에 금식까지 선포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줄 거라는 이런 믿음의 출처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참으로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돈이나 받으면서... 돈의 액수를 봐 가면서...
복을 주시는 분입니까?
헌금만 많이 하면 인간적인 복이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내가 바라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주님은 마춤 제작하여 여기있다 가지라 하며 주시겠습니까?
사실 저 역시 이런 말 할 자격은 없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키 165 이상에 믿음 좋고 똑똑하고
이쁜 자매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으니
남에게 뭐라고 할 자격은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붙여주신 자매는
키 155에 통통하고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 자매였는데
단지 흠이 있다면 자아가 좀 강해서 마음 고생은 좀 했지만...
저를 겸손의 도구로 연단하기 위해 아주 적절하게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자매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ㅜㅜ
결국 시간이 지나서 보니
하나님의 뜻이 정답이라는 게 증명되어 주님께 두 손 들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천사보다도 못한 존재로 피조되었고
더군다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끝도 없이 광활한 뜻을 흉내 내기조차 힘든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는
극히 제한된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내가 이렇게 원합니다.
주님의 뜻은 중요하지 않으니 내 뜻대로 해 주시면
된다고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육신적으로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해본 적 있습니까?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는 기도는
그저 주님만 괴롭게 할 뿐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뜻과 우리가 원하는 뜻이 다르면
천하 만물의 주관자이신 주님은 주님의 절대 주권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사실 기도를 안 들어주심도 우리를 위한 기도 응답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뜻과
우리가 원하는 뜻의 공통분모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공통분모 안에 들어왔을 때
주님은 비로소 귀를 쫑긋 세우기 시작하십니다.
근데 그 공통분모를 어찌 아느냐구요?
성경을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성경 속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냥 그대로 하면 됩니다.
좁은 길 가라면 가고, 십자가를 지라면 지고,
진실로 회개하라면 하고,
이방인처럼 세상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실 때 순종하면
우리는 진실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아주 쉽게 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뜻에 주님께서 맞추시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공통분모는
극히 제한된 지식을 소유한 우리가 맞춰 나가야지
주님께서 맞추면 당연히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보니 공통분모는 나의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주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의 영을 거룩하게 살리며
이웃에게 덕이 되는 공의로운 기도가 공통분모더군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고
우리가 당연한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들의 정욕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절대 안 들어주심이 기도응답입니다.
안 들어줘야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피조세계는 그나마 질서가 유지될 것입니다.
물질 복 받았다는 사람들 눈여겨 보십시오.
그 복이 주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닌지...
그 사람이 물질을 어디에 대부분을 사용하는지 알게 되면
금방 분별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물질은 그 물질을 가지고
이웃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라는 청지기로서의 물질 복이지
내 맘대로 나를 위하여 호화롭게 막 쓰는 그런 복이 아닙니다.
기복적인 목사님들은 아브라함을 물질 복의 대명사로 세우고
아브라함이 누린 물질복만 설교할 뿐,
그의 뒷 배경을 안다면 결코 그런 설교 못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했고,
거친 광야에서 수많은 연단과 고난이 있어도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여 믿음을 지켰으며,
물질이 많아도 자신이 거느린 부족과 동고동락하며 똑같이
먹고마신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혼자 넘치도록 먹고 마셨으면서 거느린 부족에게는
마른 빵만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물질복을 받은 청지기로서의 참된 모습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박00 전도사님이 어떻게 물질 복을 받았는지
그분 삶의 배경을 알아보십시오.
지옥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아름답고 신실한 신앙의 정절을 지키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모했기에
주님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그 전도사님에게
물질의 청지기로 맡길만하니 물질 복을 주신 것입니다.
즉,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생활화된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실한 믿음도 아니면서 작정기도 하고
헌금만 많이 하면
물질 복 수십 배 주시겠지 하는 분이 아직도 있다면 포기하십시오.
주님께서 관심 있는 것은 우리가 내는 돈의 액수도 아니고,
자기만의 열심으로 피 터지게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과연 성경에 기록된 합당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나,
얼마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만한 믿음을 가지게 할까...
어떻게 하면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나게 할까...
이렇게 영혼을 살려
거룩한 모습으로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하게 하는 것이지,
세상적 결과만을 탐하는 그런 기도는
우리의 육체만 힘들게 학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31~33)
이 말씀이 하나님과 우리의 공통분모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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