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3초의 여유”라는 글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 기다리자. 정말 누군가 급히 오고있을지도 모른다.
출발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경적을 누르지 말고 3초만 기다려 주자.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서서 기다리자. 그 사람의 아내가 정말 아플지도 모른다.”
이런 등의 이야기입니다.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집단 무의식에는 기다림보다 서두름이 지배적입니다. 과정보다 결과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어릴 때 할머니는 밥먹는 식을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은 비벼 먹고, 반은 말아 먹으라”.
밥을 먹을 때도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먹어도 맛있게 먹고 배만 부르면 됩니다.
밥을 먹는 식도 순서보다 결과가 중요합니다. 비벼 먹는 것이나 말아 먹는 것이 다 혼합적이고 빨리 먹게 하는 방법입니다.
할머니는 밥을 먹을 때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빨리 먹고 나가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오랜 관습은 기다림이 결코 미덕도 가치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든 생물들은 기다림에서 자랍니다. 인간의 사고는 기다림에서 커지고, 인간의 육체도 기다림으로 성숙해집니다.
모든 다른 피조물들은 선천적으로 기다림이 인간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다른 동물이나 식물은 인간처럼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루시 쇼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도 흔히 기다림을 지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이며 성경번역자인 필립 브룩스 목사님이 하루는 안절부절하며 어쩔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곁에서 그를 도와주던 어떤 분이 “목사님, 왜 그렇게 안절부절하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나는 한시가 급한데 하나님은 도무지 급한 것이 없는가 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기다리고 서서히 자기의 때가 오게끔 만드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에 지쳐 아우성일 때도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도 느긋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느긋하심은 출애굽과 가나안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사람은 기다림의 사람입니다. 기다림은 약속에 대한 확신입니다.
프랑스속담에는 “기다림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본 기다림입니다.
서둘러서 되는 것은 낭비밖에 없습니다. 기다림이 아름다움이라면 서두름은 추함입니다.
뛰어난 협상가들은 기다림이 무기라고 가르칩니다. 잘 기다리는 사람이 마지막의 승리를 쟁취합니다.
신앙인의 눈으로 본 기다림은 인생이라기 보다 신앙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기다림은 무엇을 위한 지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입니다. 기다림 속에 이미 의미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시간보내기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넋을 놓고 때가 되면 맞이하기가 아닙니다.
기다림은 적극적인 노력을 요청합니다. 기대감을 갖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영적 삶의 기초입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가장 유일한 게으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즐겁게 맞이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 이성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