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14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빌레몬서 2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디모데후서 4:10-1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바울은 옥에 갇혀 있을 때마다 데마를 언급합니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는 서기 62년경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처음으로 갇히게 되면서 쓴 서신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두번째로 갇혔을 때 쓴 마지막 서신으로서 서기 67년경에 기록된 서신입니다.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첫번째 갇혔을 때, 즉 서기 62년 경에 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서는 데마라는 사람이 크게 칭찬받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과 절친한 사이였으며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하는 일행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그를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부를 정도로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후 5년 후인 서기 67년 경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디모데후서를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분위기는 매우 슬프고 괴롭고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마치 주께서 가룟 유다를 향하여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 하시며 나타내신 안타까움이 연상됩니다.
디모데후서를 쓸 때의 바울의 상태는 매우 늙고 힘이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춥고 배고픈 깊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보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죽음이 코 앞에 다가 온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서신을 통해, 지금 너무 추우니 올 때 따뜻한 겉옷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우리는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연약하고 불쌍한 노 사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코 앞에 둔 이러한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바울의 마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는 아픔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을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바울을 버립니다. 더욱이 그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어떤 해를 끼쳤는지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알렉산더는 바울의 마음에 큰 상처와 피해와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 괴로움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을 준 사람은 데마였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데마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데마라는 사람은 오른 팔과 같은 사람이었고 매우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한 동역자가 지난 5년 이상의 진실한 우정과 동역을 저버리고 갑자기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사랑한 나머지 바울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추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바울에게 가장 큰 고통과 실망을 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 떠났습니다. 데마는 잠깐 세상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사탄의 유혹에 져서 잠깐 동안 세상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데마의 경우는 5년 이상 바울과 함께 지내본 후에 주님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재 타락’이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22절은 재타락에 대해 표현합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도다.”
히브리서 6장 역시 재타락에 대해 언급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3-6).
빌립보서 3장도 재타락한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20)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로 데마와 같은 자들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잠깐 즐거워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씀을 잃어버리고 말씀을 싫어 하는 자들은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또는 말씀을 듣고 한동안 기쁨으로 받되 환란이나 핍박이 생기면 말씀을 버리고 도망가는 자는 ‘돌밭에 뿌리워지는 자요’, ‘가시밭 같은 자’들은 세상의 쾌락과 돈의 유혹과 이생의 염려로 서서히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잃어가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든지 아니면 재타락의 과정에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재타락한 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열심히 성경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주를 사랑하기보다는 다시 세상이 좋아서 세상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모든 것을 새 출발하며 참된 신앙 생활을 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술도 끊고, 음란한 관심도 끊고, 폭언과 욕설을 버리고, 거짓말과 남을 미워하는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멀리하며 회개한 것 같았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존경하며,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매일 읽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체험하고 방언 등과 같은 신앙 체험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과거로 돌아갑니다.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하다보니 예배를 멀리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상태와 점점 같아집니다. 성경을 멀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임을 믿지 않으며 다시 교만하여집니다. 차차 술도 하고 음란하여지고 사치와 방탕에 젖어듭니다. 세상의 유익을 위해 거짓말을 쉽게 내뱉으며 세상 쾌락을 좇으며 다시 세상을 사랑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부패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주님을 떠납니다. 교회를 떠납니다. 이것이 재타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과거 상태와 삶의 관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데마의 재타락을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즉, 데마가 무엇을 ‘가장’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는 데마는 세상을 주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타락의 뿌리입니다. 재타락의 원인은 다른데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데마를 유혹했던 ‘세상’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원본을 보면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세상’은 “아이온”이라는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뜻은 그 세대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라고 하는데 그 구절에서 ‘세대’는 ‘아이온’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The city of God, 신국론>에서 이 세상, 즉 “아이온”은 세상을 이끌고 나가는 정신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상 정신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정반대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정신은 높은 자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낮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신은 뭐든지 남의 것을 빼앗는 착취하는 정신이지만 하나님 나라 정신은 뭐든 은혜로 나누는 정신입니다. 하나님 나라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자리로 나가는 정신으로서 그 특징은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과 겸손이지만 세상을 이끄는 정신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를 높이며, 자기를 선전하고, 자기 만족을 위하여 사느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멀리하고 무관심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은 ‘세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치스럽고 현란하고 선정적인 것들을 향해 갖는 정욕을 말합니다. 사진, 영화, 그림, 쇼, 외모, 명품 등, 일반적으로 상업과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상업적인 광고는 언제나 변함없이 안목의 정욕을 자극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쾌락 그 자체를 육체로 누리는 것들을 말합니다. 술, 마약, 성적인 부패, 담배, 춤 등의 방탕을 뜻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인기와 권력과 학벌과 돈과 명예와 감투 등, 자기 자랑을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다는 말은 그 시대의 정신을 좇아간 것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볼 때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 및 세상을 향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데마는 몇 년 동안 로마에서 바울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눈으로 보는 로마 제국을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와 당장 눈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솟아 오른 세상 나라 로마가 비교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경험되는 나라와 반면에 손만 펼치면 만질 수 있는 육감적이고 쾌락적이며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찬 현란한 세상 나라인 로마를 보았습니다. 데마는 이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하더니 어느날 결단을 내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것입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의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상업 중심지로서 돈과 사치와 쾌락과 우상이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즉,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말은 이제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돈과 인기를 위하여 발 벗고 나섰다는 뜻입니다. 데마는 보이는 이 세상의 부요함과 쾌락과 방종을 좇아 과거의 생활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데살로니가로 가기 전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차단되어 있는 불신자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마음 속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주 예수를 좇아서 따라와 보니 나만 손해 보는 것이구나. 내 친구들은 지금 영광을 누리고 큰 집도 사고, 기가 막힌 승용차와 술과 쾌락으로 살고, 여러 첩들을 두고 신나게 사는데 예수를 좇은 내 인생은 오히려 형통하지 않았구나. 알고보니 예수를 좇아봐야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또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길이구나. 내가 그분만이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랴. 바울을 보니 고생만하고 세상의 권력 앞에서 비참하게 되는구나. 오늘 더 잘먹고 잘사는 것이 내게 더 시급하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 지금 내게 무슨 소용이랴!’
데마는 소위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핍박과 가난과 고난과 자기 부정이 요구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오랜 기간의 고민 끝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를 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방법과 정신과 목적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존경했던 바울은 가장 명문대인 가말리엘을 졸업했고, 그가 말할 때마다 수백, 수천명이 와서 듣는 것을 보면서 데마는 바울이 누리던 영광을 보며 바울을 좇았습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자신도 그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던 바울이 감옥을 들락거리더니 이제는 사형 선고를 받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마는 바울을 통하여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에 매우 낙망하고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바울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환락과 상업의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믿던 바울을 배신하고,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아마도 데마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바울에게 속았고 예수에게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로 가면서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정신에 묻혀 살 때 감옥에 갇힌 바울이 부끄럽게 느껴지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데마는 어쩌면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에 가서 세상적으로는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유명한 사람이 되어 한 세상 호화를 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볼 때는 데마는 실패자입니다. 배도자이며 재타락한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로 있던 가롯유다도 주님을 떠났습니다. 왜 떠났습니까? 성경은 그가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롯의 처가 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까? 그녀는 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쾌락과 부귀와 안락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데마처럼 한동안 구원을 받은 것 같이 보였지만 결국 그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세상을 향한 미련으로 인해 뒤를 돌아보아 영원히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이 더 즐거운 것은 아닙니까? 주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세상에서 즐기는 오락과 사치와 방탕과 영광이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세상의 영광을 기준으로 하여 교회를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 복음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대형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나 세상의 불신자들 앞에게 이 거룩한 교회를 자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데마 정신에 빠져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얼마든지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탈을 쓰고 세상의 정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즉, 교회를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데마가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기도를 드리면서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얼마든지 데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금식과 구제와 제사에 힘썼던 바리새인들을 가증히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며 그들 모두가 데마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신앙 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중심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보시며 가증하다 말씀하셨고, 회칠한 무덤이며 사탄의 자녀라고 부르셨습니다. 나아가 여우와 뱀으로 묘사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위선자들이 교회 안에 있는 데마들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데살로니가로 가고 싶어하는 데마가 다 있습니다. 홍해를 지나는 출애굽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한없는 찬양과 영광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배고프고 목이 마르니 당장 애굽을 그리워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민 11:4-7).
이것이 데마 정신입니다.
우리 안의 데마를 봅시다. 인생을 바꾸고 참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때 버렸던 세상! 이생의 자랑과 쾌락과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버린다며 눈물 흘리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어느새 다시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안일함을 추구합니다. 말씀 자체에서 누리던 기쁨 대신에,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통해 나누던 풍성함 대신에, 어느새 데살로니가를 사랑하여 기독교라는, 그리고 교회라는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장소만 옮겼을 뿐이지, 다시 세상의 유혹을 받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데마이며, 궁극적으로 그 데마가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한다면 그가 바로 재타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끊임없이 인기를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수입을 바라며 하나님을 불러댈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만일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오히려 고난을 주시고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 만일 참 신자라면 주의 징계를 받으면서 “아, 내가 데마가 되어가고 있었구나, 데살로니가로 가고 있었구나”하며 회개할 것입니다. 사실 주의 사랑의 채찍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가 이미 데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사랑의 징계로 인하여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울과 동행하길 원하는 마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과 동행하는 마음은 주님과 동행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복음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겠다고 각오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정신을 의미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마음은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대신에, 이제는 더욱 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증거하며,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선하고 바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또한 그 기쁨을 체험하였기에 세상 기쁨이 아닌 복음의 기쁨을 우리 이웃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기억합시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멸망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다름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 하나님과 영원한 자녀와 시민으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의 주를 향한 모든 수고와 희생에 억만배로 갚아주시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
이제 주께 진심으로 이러한 기도를 합시다.
“주님만이 나의 모든 기쁨이 되시옵소서. 우리 남은 삶이 주님의 기쁨될 수 있게 하소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도와 주소서. 데마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정신을 차리게 하소서.”
쏜살 같이 지나가는 우리 인생! 지금 내 인생은 주님께 어떤 기쁨을 드리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내 삶이 정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주의 심령으로 진정으로 선포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모든 기쁨이 될 때에 그때야 우리는 안전하게 데마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데마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예배 시간을 통하여 데살로니가로 내려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주께로 향하는 계기로 삼기 바랍니다. 데살로니가로 내려가지 말고 천국을 향하여 계속 달려가길 원합니다. 복음으로 인해 잠깐 받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불편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쾌락보다 더 기뻐하길 소원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다짐하는 가운데 오직 주께로만 온전히 믿음을 회복하는 그러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스데반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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