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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3단계 - 오스 힐먼

007 RAMBO 2021. 3. 12. 07:18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6)


거룩(카도쉬)은 ‘분리됨.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성은 단순히 하나님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로서. 이는 피조 세계와의 분리뿐 아니라

피조물의 죄악과 불결로부터 떠나 계시다는 것을 내포한답니다.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이<존재적 엄위성>은 

모든 피조물의 찬송과 경배의 이유가 되며.

절대적 순결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이<도덕적 우월성>은

인간들의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됩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우리 모든 자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와. 이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활동(교육. 전도. 선교. 봉사. 친교)에 있어서도

말씀처럼 거룩(구별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이 거룩은,

우리의 믿음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위한 신앙의 기본 토양과 같습니다.

<로버트 핑크>라는 교회 연구가는 60, 70년대부터

심각한 쇠퇴 현상을 겪고 있는 미국교회의 쇠락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로

바로 이 거룩성의 상실 즉, 교회가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거룩)을 요구한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1990년대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가져온 미국의 대형교회들의 공통점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더 많은 것(거룩)을 요구함으로 그들을 강한 신자로 훈련 시켰고,

그 결과 놀라운 교회 부흥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근자에 들어 가속화되고 있는 기독교인의 감소에 대해

한국기독교계의 자성의 목소리가 높습니다만,

한국교계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만한 사례연구인 듯도 합니다.

그동안 외적 성장에 치중하다보니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교인들에게 너무 적은 것만 요구한 결과,

세상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의 신자들이 양산되었고,

이러한 훈련되지 못한 다수의 신자들에 의해 오히려 교회가 세속화되고,

이 와중에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상식 이하의 교회 내의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너희의 믿음을 보이라”는”핀잔 섞인 요구와

세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외면 속에서,

오히려 교회 안의 신자들이 세상으로 빠져나가고 일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이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교인의 세속화와 교회의 세속화라는 악순환 속에서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예수의 피 냄새보다 사람의 땀 냄새만 진동하는 교회는

house는 있어도 home은 없는 가정(家庭)과 같습니다.

그저 오냐! 오냐! 제대로 된 부모의 훈육이나 양육이 없이 자라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거룩에 훈련되지 못한 신자의 신앙생활 역시

순종하고 싶은 것만 순종하는 신앙생활에 빠져,

나의 필요와 나의 소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은 항상 내 생각과 내 뜻에 따라주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믿음생활 즉,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빠지는 바.

기복신앙이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의존>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는 <순종(의지적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말합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한 사울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멜렉을 공격하여

가축을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명령하나,

아말렉을 공격한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양떼와 소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따로 챙기고

이를 지적하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고 둘러대나

<사무엘 선지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은 것이라고 나무랍니다.


이는 <사울>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반역해서가 아니요,

자기의 뜻과 생각에 따라, 자기의 판단에 따라, 자기의 계산에 따라,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로 인하여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오스 힐먼>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삶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제1단계는, 편의점(c store)을 이용하듯,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단계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나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제2단계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닥친 시련과 위기에 ‘주여 나를 도우소서!를 외치는 의존단계라 합니다.

제3단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확신단계로서

이때의 신앙자세는 오직 “주여 나를 받으소서! 라는

감사와 겸손한 순종의 삶을 사는 단계라 합니다.(욥13;15)


<헨리 블랙커버>는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우리의 삶속에서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다고 합니다.
제2단계의 믿음에 바로 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도 이 위기의 의존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그분의 손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시지만(시27;8)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3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1단계로 되돌아간다고 합니다.(갈3;3)



어차피 믿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거룩은

하나님의 자녀로의 신분에 걸맞는 인격을 갖추는 것이랍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통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과 훈육을 받아(딤후3;16)

먼저<생각>이 변하고 그리고 <가치관>이 변하고 따라서<인격>이 변하고

마침내 기존의<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변하는 것으로


성경은 이러한 변화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요3;1.고후5;17)

이렇게 거듭난 자를 반기는 하나님의 모습이

<누가복음 15장24절>에 나타나 있는바

”돌아온 탕자“를 얼싸안은 그의 아버지는

‘죽었다 다시 살아온 자요. 잃었다 다시 얻은 자’라 기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일은

내 뜻에 따라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조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The Holy Spirit is always Jesus-centered and Christ-centered!
즉.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죄를 깨닫게 하여 회개하게 하시며(요16;8-11. 요3;5),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깨닫게 하고 믿음으로 의(義)에 이르게 하십니다.(엡2;8. 요14:26)

 

즉,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하나님의 독생자)과

사역(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열린 구원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시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바로 이 성령의 특별역사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임을 인식하고,

그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 바로 나이며,

나는 죽은 자요(갈 2;20) 따라서 <나를>,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과,

오직 나를 대속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 역사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모든 것을 주장할 수 있는 소유권자임을 인정하는 논리가

나의 인격과 삶에 확실히 각인 될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진행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지으시는 것으로,

흙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옛사람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뜻으로 다시 지음을 받고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거듭나는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인격의 변화는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갈라디아주의적 외형적인 삶의 변화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지옥으로 향해 달리는 열차에 앉아 있는 우리가,

단지 천국을 향해 의자만을 돌려 앉아 간다고 해서 천국 갈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당장 지옥행 그 열차에서 내려 천국으로 가는 열차로 바꾸어 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거듭난 자 즉,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는 다른 삶의 기준과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로

“거룩한 땀”을 흘리며 살아야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 위한 구원은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요.(엡1;12)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삶을 통해 이루시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늘 입술로 고백하듯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사는 삶,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언제나 아름답고 기뻐하시는 일상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의로운 자의 삶의 모습일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허용하시고 간섭하시는 삶속에서

오직 그의 말씀과 뜻에 순종과 감사로 반응하는

거룩한 자의 복된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