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난 직분, 숨겨진 계급
(교회 내 직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첫째 사명)
아래에 있는 글은 지난번 게시판에 올린 자료인데
한번 즈음은 읽어 봄이 유익할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원래의 교회의 직분에는 기능적인 의미였으나
한국에서의 직분은 원래의 의미에
불필요한 의미가 많이 포함이 되어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나 스스로가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직분을 가지고 있거나 없는 분들을 바라보는 눈이
올바르게 될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고릴라 집단 가운데 수컷 우두머리의 등에는
은빛 털이 돋아난다고 한다.
자신감이나 승리감과 관계가 있는 세로토닌이란 신경전달 물질이
고릴라의 털 색깔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참새의 수컷 가슴에는 역삼각형의 검은 털이 돋아나 있다.
무리 가운데서 지위가 높을수록 이 삼각형이 커진다.
삼각형의 크기로 서열이 정해진다.
인간은 동물과 같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이런 생리적 변화를 통해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제도나 관습 등을 통해
지신의 지위를 어떻게든 드러내 보이려고 애쓴다.
학창 시절 학급의 개구쟁이에게 ‘규율’이나 ‘선도’ 완장을 채워주면
곧바로 의젓해지는 것을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민방위’ 완장을 채워주고 등화관제 훈련을 하면
점잖은 아저씨들도 그 순간부터 사람이 변한다.
남의 집 대문을 발로 걷어차며
'불 끄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계급이 존재할 수 없는 교회 안에서도
직분 때문에 상처 받고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적잖다.
교회 직분은 흔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다양한 지체(肢體)로 비유된다.
지체는 그 하는 일에 구별은 있을 수 있으나 차별은 없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전 12:20-21)
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마음속에 낀 앙금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교회 직분을 대하는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전에 층이 나있다.
장로로 임직 되는 순간부터
신분상의 변화가 교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많은 교회의 경우 교회 주보에
목회자와 함께 나란히 장로의 이름을 올린다.
시무장로뿐만이 아니다.
원로장로, 협동장로, 심지어 은퇴 장로의 이름까지 빠트리지 않는다.
마치 회사 등기부 등본에 이사 이름을 등재하듯 한다.
기록상 변화는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다 같은 교인인데 누구는 교회 문 앞에 서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듯 교인을 영접한다.
도열해 있는 장로의 순서에도 대부분 서열이 매겨진다.
목회자 옆에서 내미는 그들의 손을 잡을 때마다
나는 그 교회의 영원한 손님임을 실감한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흔한 일이다.
직분이 사회적 신분상승의 기회로 왜곡되는 경우가 적잖다.
그래서인지 직분을 놓고 벌이는 다툼도 그 정도를 넘어선다.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제 어디를 가면 “장로님이냐?”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아니다"라는 대답 다음에 오는 상대방의 경망한 언행에 대해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있다.
평등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지체임을 들먹이면서도
교회 직분에는 상승의 길만 있을 뿐이다.
직분 간 이동이나 순환은 없다.
이것 역시 직분의 층을 우리 스스로가 돋우는
또 하나의 제도적 모순이다.
안식교에서는 목사가 은퇴 후에 장로로 봉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선한 충격이다.
직분은 봉사다.
장로, 집사 직분을 맡는데 특별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서는 직분 간 이동이나 순환이 불가능한지 모르겠다.
직분의 성(性) 간 차별이 사라져 가면서
교회 안의 직분은 오히려 세분화되었다.
직분이 늘어난 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 따른 명분과 이유만큼
임무의 한계도 분명하여야 한다.
초대교회에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직분을 세분하였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어떤 사람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엡 4:11-12)
요즘 청와대에 무보수 명예직의 특보와
자문위원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여 언론의 눈길이 곱지 않다.
신세 진 사람들에게 돈 안 들이고 명함 하나 씩 만들어 준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이권이나 특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 직책을 “무슨 동창회 간부 자리 만들 듯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비판의 소리가 내 귀에는 마치 세상 사람들이
교회 직분을 놓고 벌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꼬집는 것처럼 들린다.
이제 교회 주인의 자리는 주님께 돌려 드리고
우리 모두 성문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비록 교회 안의 직분이지만
이웃을 위한 봉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대사회적 사명임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한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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