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집이든 거부의 집이든 과시적인 집은 천장이 높고 탁 트여 있지만,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곳은 사람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총애한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디자인한 제3제국 총통 관저의 긴 통로.
공간이 높고 깊으며, 대리석으로 마감돼 차가운 느낌이다.
히틀러의 방으로 향하는 방문자들은 공간으로부터 위압을 당한다.
권력은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에 비례한다.
중국의 황제는 자금성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공간을 점유했었다.
황제를 알현하려면 7개의 문을 통과하며 수백 미터를 가야 한다.
웅장한 문들을 지나 황제가 거처하는 높고 넓으며
텅 빈 공간에 이른 방문자는 스스로 왜소한 인간임을 깨닫고
그 공간의 주인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사실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런 인간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이끌어내려면
과잉된 공간적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히틀러는 이런 공간의 힘을 잘 이해한 독재자다.
그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해 총통 관저를 짓도록 했다.
히틀러가 건축가에 지시한 것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넘어
공포감을 느끼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슈페어는 긴 통로와 거대한 총통의 방으로 그것을 구체화했다.
히틀러를 만나려면 대리석으로 마감된 차갑고 높고 텅 빈 통로를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방문자들은 별다른 가구도 없는 이 공간의 무거운 침묵에 질식할 듯 압박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히틀러의 방에 도착한다.
방이라고 말하기도 무색한 100평이 넘는 이 공간에서도
히틀러의 책상까지 가는 데 1분이 걸린다.
총통 관저는 오로지 방문자들의 심리적 압박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이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히틀러는
체코의 대통령을 이곳으로 불러 협상을 했다.
체코 대통령은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이미 기가 질려
두 번이나 기절한 뒤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만다.
1, 4
_찰리 채플린 감독의 '위대한 독재자',
1940년. 힌켈(히틀러)과 나폴로니(무솔리니)는 서로 높은 위치를 점하려고 이발소의 의자를 높인다.
2
_여주인공 캐롤라인은 크고 화려한 저택에서 살지만
불편하고 무섭기만 하며 늘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녀를 괴롭히는 건 남편 전처의 망령이 깃든 건축 공간이다.
3
_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 1940년. 대저택 맨들리의 하인들이 새로운 여주인을 맞이한다.
화려한 집과 격식 차린 서비스는 가난뱅이였던 새 여주인을 주눅 들게 한다.
4
_찰리 채플린이 히틀러를 풍자한 영화 '위대한 독재자'에서도 높고 넓은 공간들이 등장한다.
채플린은 이 공간들을 재치 있게 희극적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독재자 힌켈(영화에서는 노골적으로 히틀러라고 하는 대신
가상의 국가 토마니아의 힌켈이라는 이름으로 표현)은
다른 독재국가 박테리아의 나폴로니(무솔리니의 희화)를 만난다.
그들은 천장이 무척 높은 이발소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이발소 의자의 레버를 조작해 의자의 높이를 경쟁적으로 높인다.
높은 위치에서 상대를 내려다보려는 것이다.
익살스럽게 의자는 한없이 올라갔다가 다시 밑으로 처박힌다.
마치 그들의 몰락을 예고하듯.
큰 공간의 스릴을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영화 중 하나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다.
이 영화에서 공간은 마치 살아 있는 인격처럼 주인공을 괴롭힌다.
여주인공 캐롤라인은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처녀로
속물스런 귀부인의 말동무를 해주며 푼돈을 번다.
그녀는 운좋게 아내와 사별한 '막심 드 윈터'라는 나이 많은 홀아비와 사랑에 빠지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의 집으로 향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이제 행복이 펼쳐질 것만 같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편의 대저택인 맨들리.
저택의 문이 열리고 집에 도착하는 데까지 광활한 숲을 지나야 한다.
중세의 성 같은 집으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하인들이 도열해 맨들리의 새 여주인을 맞이한다.
캐롤라인은 갑작스런 신분 상승이 기쁜 것이 아니라 두렵기만 하다.
게다가 전부인의 충복이었던 댄버스 부인 앞에서 캐롤라인은
마치 시어머니 앞 며느리처럼 쩔쩔 맨다.
탁 트인 공간, 화려한 가구, 하인들의 격식 차린 서비스,
이 모두가 그녀를 주눅 들게 한다.
캐롤라인은 어느 날 남편의 죽은 전부인 레베카의 방을 찾아가고,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방을 안내해준다.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우아한 커튼, 꽃 모양으로 장식된 화려한 벽,
로코코풍의 가구들, 장식으로 가득한 침대, 장인이 정교하게 수놓은 속옷들.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흔적이 담긴 최고급 취향을 과시하며
가난했던 새 여주인을 조롱한다.
댄버스 부인이 "맨들리 저택의 모든 곳에 레베카가 있고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다"고 말하자 캐롤라인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이 영화는 드넓은 저택에서 의지할 곳 없이 남편 전처의 망령에 시달리는
여주인공의 심리적 공포를 다루고 있다.
죽은 레베카의 망령은 커다랗고 위압적인 공간, 사치스러운 소유물에 깃들어 있다.
캐롤라인이 느끼는 위협과 공포의 근원은 바로 숨막힐 듯한 이 공간에 있는 것이다.
소유자가 우월감을 느끼는 공간일수록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이런 공간의 목표 자체가 우월감이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집이든 거부의 집이든 과시적인 집은 천장이 높고 탁 트여 있지만,
그곳을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곳은 사람을 작고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출처 : 그날이 오면 / 신기한
'펀글모음 > 일반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의 블랙박스 영상 (0) | 2014.07.29 |
---|---|
로마 교황의 축복(?)...저주(!) (0) | 2014.07.21 |
상대방 핸드폰이 꺼져있으면 (필독) (0) | 2014.05.06 |
치명적인 원인 (1) (0) | 2014.05.05 |
Leonid Afremov(레오니드 아프레모브)의 작품세계 (0) | 2014.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