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꿈으로, 환상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지식의 말씀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지혜의 말씀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예언의 말씀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숫자들을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성경 구절들을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연구를 통해,
아주 여러가지 방식으로 소통하십니다.
물론 한 사람에게 이런 방식들 중 여러가지 방식들을 통해 소통하시기도 하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라고 가르칩니다.
'세미한 음성'이란 대체 어떤 걸까요?
최근 몇년 동안 내가 가장 집중하고 관심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듣는 법’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 아니라,
내가 듣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명히 나처럼 똑같은 오해 가운데 있는 지체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것을 나누는 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게 분명히 보여주신 것은
내가 어떻게 대적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와
대적의 음성이 어떤 형태로 오는가였습니다.
한참 주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잘 나가다가
어느 날은 말할 수 없는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나의 삶 속의 슬픈 부분들이 하나 하나 다 떠오르면서,
나의 불행한 상황들에 대해 묵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는 이리 지지리도 복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하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되어
하루 종일 우울하게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갑자기 뭔가 정신이 차려지면서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게 대적의 음성이다.’
나는 나의 현실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대적이 나에게 속삭이는 음성이었고,
나는 그것을 수긍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음성의 형태로 내게 오지 않았고 내 생각의 형태로 왔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적이 내 영에 속삭이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내가 번역을 많이 하기 때문에 더 잘 깨달아진 것인데,
주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레마 말씀들을 번역하다 보면,
정확한 번역을 위해 문법을 꼼꼼하게 살피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문법적으로 좀 오류가 있어 보이거나
단어가 잘못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 등
인간적으로 오류가 있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영문법을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벽하신 분이신데,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런 오류가 보이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미국인은 미국말로 말씀을 받고,
한국인은 한국말로 말씀을 받고,
독일인은 독일말로 말씀을 받습니다.
심지어,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은 사투리로 말씀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성령께 받은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메신저들에게 독특한 어투와 자주 쓰는 어구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령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 메신저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일까요?
왜 같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메신저마다 다른 스타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 의문에 대한 나의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이시고,
그분의 성령으로 우리의 영에 그분의 뜻을 다운로드 해 주시는데,
우리 영으로 다운로드된 그 뜻을 우리의 마음이 해석해서
언어의 형태로 번역해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퍼트리샤 그린'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경우는, 확실히 알긴 아는데
말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영으로 다운로드 해 주신 의미를
언어로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잠잠히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영에 다운로드된 주님의 뜻을
우리의 마음이 해석해 내도록 시간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지 않는 것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 받은 그 메세지를 해석해 내는 사람에 따라
독특한 문체나 어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실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의미는 완벽하지만,
주신 의미를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 가운데
문법적인 오류도 있을 수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레마 말씀 비디오들을 보다 보면
메신저가 읽어준 말씀을 다른 사람이 받아 적어서 댓글에 적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런 글들을 직접 비디오를 들어보며 일일이 확인해 보는데,
거기에는 단어를 잘못 받아 적었거나, 단어를 빼 먹었거나 등등 거의 항상 실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그것을 받아 적은 다음에 여러번 재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받아 적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작은 실수도 지적받는 환경에서 모든 것을 꼼꼼하게
여러번 지겹도록 다시 재확인해야 하는 환경에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통 내가 적은 것을 여러번 확인합니다.
그런데, 다시 확인할 때마다 오류가 발견되어서 계속해서 고쳐야 합니다.
가끔은 정말 환경이 허락지 않거나 너무 피곤해서 한두번만 확인하고 넘어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오타나 다른 오류가 꼭 한 두개씩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심지어 불러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데도 실수가 있는데,
어떻게 영으로 받은 것을 사람의 언어로 해석해 내는데 있어서
전혀 실수가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받은 메세지에 대해
각자가 주님께 기도로 가지고 가서 확인하고 검증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메세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나온 메세지가 맞는지,
대적이 슬쩍 섞어놓은 것은 아닌지,
성경 말씀과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그것을 확인하는데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들리는 음성으로 특정한 단어나 문장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의 들리지 않는 음성을
우리의 마음이 인지하고 해석해 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 가운데 이런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인식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님께 의존해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개인적 경험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주말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물건을 잔뜩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것들을 다 정리하고 저녁을 먹고 난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씻으려고 하다가 마트에서 샀던 세안용 비누가 생각났습니다.
내가 물건을 반쯤 정리하고 다른 일을 보는 동안
다른 가족이 나머지 물건을 정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비누를 봤는지를 가족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못 봤다는 것입니다.
나도 본 적이 없는데, 그럼 그것이 빠져 있었던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차 트렁크를 뒤졌는데, 없었습니다.
혹시 잘못 넣어두었나 해서 이곳 저곳 다 뒤져봐도 없었습니다.
영수증을 검사해보니, 영수증에는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계산대에서 아줌마께서 실수해서 봉지에 안 담으셨던 것일까요?
갑자기 계산대 아줌마에게 화가 쓰윽 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속에서 ‘생사람 잡지 말자. 아직 모르는거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비누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그 비누를 써보고 싶어서 산건데 없으니까 좀 짜증이 났습니다.
정말 별거 아닌데, 이런 것에도 신경이 쓰이는게 사람입니다. 구제불능 죄성이죠.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별거 아닌데, 이것이 정말 신경이 쓰여요.
이 비누가 어떻게 된건지 알게 해 주세요.
이것이 실수로 마트에 남겨진 것인지,
아니면 집에 왔는데 우리가 못찾고 있는 것인지 알게 해 주세요.
만일 이것이 여기 어딘가에 있다면 어디 있는지 찾게 해 주세요.
이것으로 인해 마트 아줌마에게 부당한 감정을 가지지 않게 해 주세요.
내가 물건을 찾을 때마다 항상 찾아주셨었잖아요.
이번에도 도와 주세요.’
라고 기도했고, 이것을 마음에서 내려 놓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컴퓨터를 열었는데,
마음 속에서 이런 세미한 생각이 살짝 스쳐 지나갔습니다.
‘영수증 다시 확인해 봐라.
그 물건 위 아래에 무슨 물건들이 계산되어 있는지 확인해 봐라.
그러면 어떤 물건들과 함께 들어간 봉지에 있는지 알 수 있을거다.’
나는 당장 일어나서 영수증을 펼쳐서 비누 위와 아래에 계산된 물건들을 확인했습니다.
비누 아래에 내가 풀지 않았던 물건인 크림빵들이 계산되어 있는 것을 보았고,
가족에게 물었습니다. “크림빵 어디 있어?”
그때 그 가족의 얼굴을 스쳐가는 당황함… ㅎㅎ
갑자기 생각난거죠. 회사에 가지고 가려고
빵봉지는 풀지도 않고 다른 방 탁자 위에다 올려 놓았던 것입니다.
그 안에 빵만 들어있을 거라고 추측했었던 거죠.
내가 그 탁자 위로 가서 빵봉지를 뒤져 보았을 때
그 안에 내가 찾던 그 비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별거 아닌 일상의 작은 문제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말씀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요!
나는 큰 소리로 가족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이 정말 좋으시다! 주님이 정말 좋으셔!
주님께서 이것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셨네.
주님께서 나한테 정말 잘 해 주셔!”
주님과 같이 동행한다, 주님과 같이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의 모든 짐을 내게 내려 놓아라.’ 고 말씀하셨을 때는
크고 중대한 문제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문제까지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크고 위대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런 작은 일상에서까지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음성의 형태로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런 형태없이 그냥 스쳐가는 생각이나 느낌처럼도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서 인식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이 있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지나가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내려놓고, 버리고, 주님께 민감해지도록 훈련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매일 하는 기도는 주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제거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오직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것으로 더 많이 채워질 때
우리가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 더 민감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http://blog.naver.com/spiritualwarfare/22076161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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