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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이 몇 살 먹었어?” 나이 타령만 하는 한국

007 RAMBO 2015. 11. 2. 22:25

주간조선 조성관 편집장 / 기사입력 2015-11-02 10:50

 

 

오랜 형사 생활을 한 인사가 최근 들려준 이야기다.

“음주폭력 사건 발단의 50% 이상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왜 쳐다봐’ ‘뭘 봐’로 시작합니다.

상대가 나를 쳐다보았다는 게 말싸움의 시초가 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이렇게 시비가 붙은 두 사람이 나이 차가 날 경우엔 사태는 대개 이렇게 전개된다.

감정이 격해지면 대개 나이 많은 쪽이 반말을 한다.

그러면 나이 어린 쪽이 “왜 반말을 하세요”라고 반박한다. 그러면 공식처럼 나오는 말이 있다.

“어, 어린 놈이 대드는 것 좀 봐라.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게. 너 나이 몇 살 먹었어?”

이렇게 나오면 또다시 공식처럼 답변이 나온다. “여기서 나이가 왜 나옵니까?”

“하, 이 자식 봐라. 지 애비 같은 사람한테 눈을 부라리고. 얌마, 내가 너만 한 자식이 있어.”

이런 거리도 안 되는 시비가 주먹다짐으로 번지고 끝내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까지 간다.

기자는 주말 아침 종종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에 잠을 깨는 경우가 있는데,

시비의 대부분은 역시 나이 문제로 끝나곤 했다.

한번 나이가 거론되고 나면 애당초 잘잘못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원인 제공자의 책임은 유야무야된다.

알려진 대로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1975년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컴퓨터 사업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컴퓨터 사업 아이디어를 갖고 있던 빌 게이츠는 과감하게 하버드대학을 때려치웠다.

1997년 케임브리지대 강연에서 빌 게이츠는 이와 관련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먼저 첫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를 시작할까봐 두려워 하버드대를 중퇴했습니다.

내가 변호사나 수학자가 되려 했다면 하버드대학이 좋은 곳이었겠지만 내 꿈은 컴퓨터 사업이었습니다.”

빌 게이츠, 마이클 델, 저커버그 등은 모두 20대에 창업해 부호가 된 사람들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20대 창업이 하나도 새로울 게 없다.

그러니까 빌 게이츠가 대학을 중퇴하고 스무 살에 컴퓨터 소프트웨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20대 사업가, 심지어는 고교생 사업가를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 문화가 선진국에는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아이디어와 상품의 질만을 평가하고 판단할 뿐이다.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상대가 20대이면 대기업에서 사업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일부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을 속여 제 뱃속 채울 궁리만 한다.

설령 사업파트너로 인정한다고 해도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만일 20대 사업가가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 이런 반응이 나온다.

‘(건방지게)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돈이나 밝히고 ….’

그들은 젊은 사람은 돈을 밝혀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편다.

최근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등장한 신조어 ‘열정페이’가

바로 이 같은 기성세대의 의식을 반영한다.


법이 정한 최저임금을 주지 않거나 훨씬 못 미치는 월급을 주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가리켜 ‘열정페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이 어린 사람의 노동력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영화 ‘인턴’에서 보면 인턴에 합격한 70대가 젊은 사람과 친구처럼 지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가능한 게 나이를 따지지 않는 서양문화와 유(You)라는 호칭 문화에서 기인한다.

20대 인턴이 70대 인턴에게 ‘유’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친구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20~30대 여성들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면서 봉변을 당한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다.

봉변의 대부분은 언어 테러인데, 언어 테러를 가한 이들은 남자 노인들이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많다.

요즘에는 전화통화를 너무 크게 한다는 것도 시비 대상이 된다.

치마가 짧다고 시비를 거는 노인도 더러 나온다.

나이 든 것을 무슨 벼슬처럼 여기는 의식구조가 한국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이것은 물론 뿌리 깊은 유교문화에 그 원인이 있다.

 

옛말에 ‘찬물도 순서가 있다’는 말이 있다.

유교 사상의 하나인 삼강오륜에 나오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보자.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사회적 질서와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언어는 사회를 반영한다.

우리말에 존칭어법이 유난히 복잡한 것은 바로 장유유서를 비롯한

수직질서를 강조하는 문화가 뿌리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나이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영화 ‘시네마 천국’을 좋아하는 영화팬이 많다.

기자 역시 이 영화를 십수번은 족히 보았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감상 포인트를 제공한다.

그중 하나가 어린 소년 토토와 늙은 영화 상영기사의 우정이다.

영화에서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토토와 알프레도의 나이 차는

최소 50살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와 손자뻘인 꼬마가 영화라는 영상 언어를 통해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나누면서 우정을 키웠고,

이것이 꼬마가 훗날 영화감독이 되는 정서적 자양분이 되었다.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시네마 천국’의 무대가 이탈리아가 아닌 한국이었다면

어린 소년은 영사기사와 그런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동네 할아버지가 자기 혈육이 아닌 동네 꼬마를 귀여워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로서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쌓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이를 따지는 사회에서는 나이 차를 뛰어넘는 우정이나 사랑은 여간해서 성립되기가 힘들고,

또 성립된다고 해도 사회의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

만일 우리나라의 어떤 노인이 알프레도처럼 행동했다가는

망령 든 이상한 노인네 취급받기 십상이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는 세대 간의 소통을 차단한다.

한국 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젊은이는 젊은이끼리,

노인은 노인끼리 사귀고 대화를 나누도록 되어 있다.

젊은이는 노년 세대의 경험과 지혜를 배울 기회가 부족하고,

반대로 노년 세대는 젊은층의 열정과 패기를 접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 결과 각 세대는 서로에게 벽을 쌓은 채 단절된다.

나이를 따지는 문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조로(早老) 현상을 불러온다.

극단적인 곳이 방송계다. 방송국 앵커는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30~40대다.

특히 여성 앵커의 경우는 어지간해선 30대를 넘지 않는다.

피부가 팽팽할 때만 여자 앵커석에 앉는 것 같다.

젊고 예쁘다는 느낌만 들지 관록과 원숙미는 찾기 힘들다.

이렇게 ‘젊은 앵커’만을 찾다 보니 미국 CNN이나 ABC방송처럼

주름진 60대 앵커는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

영화 ‘인턴’이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까닭을 생각해본다.

70세 인턴이 나이를 앞세우지 않고 오로지 인턴이라는 자기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