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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는 신학을 해야한다고?

007 RAMBO 2015. 3. 9. 22:33

엊그제는 오랫동안 기도 코칭을 하던 자매님이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담임목사의 사모가, 자매님은 사명을 받았으니까 신학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학을 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재차 물으니까,

성경지식도 쌓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필자의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동안 필자 주변에서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 날 사명을 받았다며 줄줄이 신학교에 들어간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사명자는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를 해야 한다는 얘기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사명자라는 표현이 성경적인 관점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생각해보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신학을 권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학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신학교를 운영하는 학장이거나 그의 아내 등이다.

그들이 권유하는 신학교는 교회에 부설로 붙어있는 총회신학이다.

 

규모가 작다고 필자가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는 신앙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신학이론은 배우는 곳이다.

그렇다면 국내외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오랫동안 신학을 연구하는

교수진이 알찬 커리큘럼을 가지고 가르치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 부설로 붙어있는 군소신학은 그런 교수진이 있을 턱이 없다.

 

또한 그곳에서 가르치는 교수진이 검증된 신학자일 확률이 극희 희박하다.

물론 박사학위도 있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논문을 학회에 발표하고

연구한 결과를 책으로 써낸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신학교가 제대로 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을 턱이 없다.

그냥 목회자 양성소인 셈이다.

 

어느 도시에 가나 교회에 부설로 붙어있는 총회신학이라는 간판을 보면,

대형교회에 부설로 붙어있는 선교원처럼

목회자의 생계유지(?)를 위해 개설한 느낌이 드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일 뿐인가?

어차피 목회자 양성소인 총회신학은 문교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돈을 받고 목사 안수를 주는 데가 널려 있는 형국이다.

 

또한 사명자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신학교는 신학을 배우는 곳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자의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그렇다면 사명자라는 게 무슨 뜻인가?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사명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신학교를 나와 목회자가 되는 게 사명자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성경에 밝힌 사명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7)

 

성경에서 나온 사명이라는 말은 모두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 데,

먼저 사도행전의 사명은 헬라어로 디아코니아’(ministry)이고,

고리도전서의 사명은 오이코노미안’(stewardship)이다.

디아코니아의 뜻은 교역, 사역, 목회라는 의미이고, ‘오이코노미안은 청지기 직분이라는 뜻이다.

결국 사명을 받았다는 뜻은 목회자로 불렀으니,

청지기 직분으로 여겨 목회사역을 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작금의 우리네 주변에서 목회자로 부르는 방식은 무엇인가?

자신의 담임목사이자 교회부설로 총회신학을 운영하는 학장이나 그 아내인 사모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투가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지나가던 개가 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다.

목회자는 목자(헬라어로 포이멘)라는 뜻으로 양을 치는 직업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고 잘 이끄는 신분인 셈이다.

그렇다면 성경 지식과 지혜는 물론 잘 가르치는 재능도 있어야 할 것이며,

타고난 리더십도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에게 잘 가르치는 은사(재능)과 리더십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

그런 은사가 없는데 하나님이 목회자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웃기는 얘기이다.

 

또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으로,

신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신학교는 신학을 가르치는 곳이지 성경학교가 아니다.

성경을 배우려면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신앙을 잘 가르치려면 성경적인 신학이론을 배워서 잘 소화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은 다르다. 교회에서는 신학이 아니라 신앙을 가르치고 양육하여야 한다.

신학이론은 신학교에서 배워서 양들을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는 퇴비로 삼고 버려야 한다.

 

아시겠지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상당수의 신학이론이 비 성경적이다.

신학교에서 가르친다고 죄다 성경적인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교회에까지 끌고 와서 양들에게 넣어준다.

그래서 성경과 다른 학문과 이론들이 예수님의 말씀 위에 있는 기현상이,

작금의 우리네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유이다.

결국 신학교를 나온다고 하더라도 능력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지식을 쌓으려면 성경사전과 신학사전의 도움을 받아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식과 깨달음은 별개이다.

말씀의 깨달음을 얻으려면 성령과 동행하는 영적 습관을 들여서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셔야 한다.

 

성경지식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신학교 간판을 걸고 성경을 가르친다면 더 웃기는 얘기다.

그렇다면 성경학교로 간판을 다시 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잘 가르치는 성경교사의 도움을 받아 성경지식을 쌓는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신학교에 간다고 성경지식이 쌓일 것이라는 오해는 하지 말라.

 

결론적으로, 수많은 사명자(?)들이 신학교를 나와 교회에 들어가거나 개척을 시작했지만,

목사직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열 명에 두명 꼴에 불과하다.

목사직을 유지하지 않은 사람은 목회를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증거인가?

종의 일생을 책임지지 못하고 무책임하게그냥 불러놓고 내팽개쳤다는 것인가?

 

많은 열정적인 교인들이 사명을 받았다는 꼬드김(?)을 받아,

직장과 사업을 팽개치고 신학교에 들어가 고단하고 팍팍한 인생의 수렁에 빠졌다.

결국 목회도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 상처와 후유증은 상상을 초월하다.

설령 목회자로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아무 열매가 없는 사역에 고단한 일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 중에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면 놀라운 영적 능력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을 세우신 분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신 게 맞지 않은가?

그런 영적 능력도 풍성한 열매도 없다면,

누군가의 속임에 넘어가 스스로 종이 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슬프고 답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