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게도 휴식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는 ‘schole’이다.
학교를 뜻하는 영어 ‘school’이 바로 거기서 왔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일 뿐 아니라,
학습의 시간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겉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
경제적으로 효용 가치가 없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였고, 휴식의 일부였다.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일 중
1등은 단연 철학일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말은
자신과 세상, 생각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지혜의 화신인 소크라테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하늘만 빤히 쳐다보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와 한두 마디만 나눠 본 사람이라면,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
총명한 정신과 평상심을 두루 갖춘
현인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진정한 휴식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굳이 철학적 사고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뒤쫓는 유용성의 길을
성급히 따라갈 것이 아니라,
여유를 두고 따지고 곱씹을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이 탄생하고
새로운 지식이 싹튼다.
이 세상을 혁신한 수많은 깨달음은
처음부터 활용 가능성만 따지기보다
깊고 넓은 생각에 시간을 투자했기에 탄생한 것이다.
느긋하게 공원 벤치에 앉거나,
소파에 누워서 떠오르는 상념에 몸을 맡겨 보라.
고민에 빠져 머리를 쥐어뜯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면
쯧쯧 혀를 차기 바쁘지만,
그런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정말로 소중한 시간이다.
이리스토텔레스는 휴식을 가르치는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휴식이야말로 지고의 행복 상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휴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휴식하지 않는다.
그저 휴식을 위해 휴식한다.
휴식이란 목적에서 자유로운 영역이다.
오직 한 가지 이유로,
즉 해서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휴식은 정말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다.
휴식에 대한 입장은 호의적이지만,
안타깝게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시간 도둑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다.
현대인의 시간 도둑 1위는 아마도
TV, 인터넷, 휴대전화, 소셜 미디어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못해 나가는 사회 활동이나 모임도
그 못지않게 시간을 잡아먹는다.
여기서도 원리는 똑같다.
‘적을수록 풍요롭다!’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는데,
의미 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아까운 시간을 보낼 이유가 무엇인가?
소셜 미디어에서 머무는 시간도
꼭 필요한 만큼으로 줄여라.
페이스북 친구의 새 글에
일일이 댓글을 못 달아 준다고 해도,
내일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이런 기계들과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낼지는
말 그대로 당신 손에 달렸다.
일상생활에서 작은 휴식의 오아시스를 만들어 보자.
퇴근길에 커피 한 잔 마시며 공원을 산책해 보자.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자.
무엇이든 행복과 기쁨을 주는 일을 해 보자.
이런 소소한 노력을 통해
차츰 당신의 삶에서도
휴식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 옮겨온 곳 : [굿 라이프 철학 수업] 중에서 -
쉼표가 없는 인생은 황폐해진다.
하나님은 쉼표를 찍고 황폐해진 우리 내면을
다시 질서 있게 가꾸라고 하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피드와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소중한 것들을 무시하면서 함부로 처리해왔다.
그 결과로 이전보다 더 편하게,
더 잘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삶은 더욱 살벌하고 피곤하며 메마르기 시작했다.
쉼표가 없는 인생은 황폐해진다.
우리가 내린 가장 어리석은 결정들은
다 우리가 지나치게 바쁘고 지친 상태에서 내린 것들이다.
하지 말아야 했던 말을 해서 상황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경우도,
대부분 우리가 바쁘고 지친 상태에서 내뱉은 것들이다.
조금만 여유를 두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기도하며 묵상하는 쉼표를 두었더라면,
성령님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점검해주셨을 텐데,
우리는 너무 바쁘고 너무 지쳐 있었다.
하나님은 쉼표를 찍으시며,
문제의 근원인 황폐해진 우리 내면세계를
다시 질서 있게 가꾸라고 하신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하천 생태계를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다.
예전에는 동네 어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작은 하천과 실개천이
농지 정리에 의해 인위적으로 사라지계 되었는데,
효용 가치가 없어 보이던 실개천이
실상은 생활하수를 정화함 뿐 아니라
생태계를 살리는 주요 원천이라고 한다.
그런 작은 개천들이 사라지면서
공해 물질이 강바닥에 쌓이고,
그 결과로 수질이 오염되어
생활환경이 많이 파괴되어 버렸다.
내 영혼의 실개천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다.
치열한 매일의 일상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 정화해야 할
영적 퇴적물이 쌓이게 한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지치고 사나워지며,
강퍅해질 것이다.
괜히 화내고 짜증내는 일이 많아지고,
원망과 불신과 두려움과 욕심과 시기하는 마음들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온다.
이때 하나님과의 교재는
영혼을 새롭게 하는 실개천과도 같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매일 성령의 생수로
영적 디톡스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묵상’(meditation)이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되받아
좀 더 자세히 본다는 뜻을 갖고 있다.
흐르는 물의 수면에는 영상이 비쳐지지 않는다.
한참 달리다가 들어온 사람은 숨이 가빠서
바로 말을 할 수가 없다.
숨을 가라앉히고 물을 마시고 좀 쉬어야 한다.
하나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바쁜 일상을 멈추고,
시간을 들여 숨을 고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소리를 끄고
(스마트폰, TV, 사람들과의 잡담)
홀로 있어야 한다.
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 세상이 뒤흔들어놓은
자기 자신을 가라앉힐 수 있다.
이 시간 동안에 성령께
거칠게 어질러져 있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정리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셀라’라는 히브리어가 자주 나온다.
이는 음악적인 쉼표를 의미하는 단어다.
다윗의 시편의 전체적인 어조를 살펴보면
‘셀라’ 이후의 다윗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론
성숙하고 수준 높은 믿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거친 숨음 몰아쉬며
자신의 고통과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던 다윗이
셀라를 반복해가면서 점점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평안과 담대한 심령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는 다윗이 셀라의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 안에 안식하면서
내면세계를 정돈했음을 뜻한다.
다윗도 우리처럼 실수와 실패가 많았던 사람이지만,
넘어질 때마다 셀라의 안식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쉼표의 은혜를 누렸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경영. 한홍.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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