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방랑자라는 유행가가 있었다.
아무런 책임이나 의무감이 없이
아무 곳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심드렁해지고 싫증이 나면,
자기가 원하는 데로 훌쩍 떠나가는
낭만적인 삶을 동경하며 지은 노래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자유로운 삶을 소망한다.
세상에 그렇게 사는 이들이 더러 있다.
미국과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집시라 불리는 민족이다.
이들은 여럿이 떼로 지어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데,
예전에는 마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다녔지만,
요즈음은 캠핑카로 바뀐 게 달라졌다고나 할까?
우리는 그들의 삶을 동경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삶을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고,
자유를 누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고통도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보는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짐 위에
신앙의 짐을 더 얹고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술과 담배도 즐기지 못하고
주일에도 아무 데도 못가고 교회에 가야하며,
주일 뿐 아니라 다른 날도
교회에서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고생해서 번 돈을
교회에 다 갖다 바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의 생각이 편견일까?
아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크리스천의 삶이 그럴 것이다.
성경대로 살자면 자신의 욕망을 죽이고,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필자의 눈에 보기에도
인생의 짐 위에 신앙의 짐을 더 얹어
비틀거리며 사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는 육체를 지닌 사람들의
눈에 비친 삶의 모습일 뿐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성경에는 바람처럼 살아간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관습과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을 옥죄는 삶의 방식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을 통제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 유일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을 보라.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을 결심하였을 때,
그는 부모와 친구와 직업과 가정을 포함한 관계를 끊고
기존의 삶의 방식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부모와 친척, 직업과 생계,
친구와 취미 등의 기존의 삶의 방식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는 데
전혀 방해하지 못했다.
아마 부모와 친척, 친구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보라.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순간,
그동안 그들이 누리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했다.
부모와 직업과 심지어는 아내와 자녀까지
그들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부모는 그들을 불효자식이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며,
친척들과 친구, 동네사람들도
미친 사람이라고 비난하고 힐난하였을 것이다.
아내는 이혼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부모는 부자지간의 연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 시작한 삶의 방식을 위해
그동안 누리던 삶을 결연히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의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3)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교 랍비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이 사는 방식을
설명해주는 말씀이 위의 말씀이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계획과 생각, 경험과 지식,
그간 살아왔던 세상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부모나 직업, 친구나 아내와의 관계나
직업이나 직장, 지위나 신분에서조차 자유롭다.
오직 새로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가?
당신은 예수를 믿어
성령이 안에 들어오신 후로,
성령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는가?
성령이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성령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듣고
성령의 마음을 읽어내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
그런 사람만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읽고 계신가?
그런 사람은
영음을 듣고 예언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착각하는 이가 적지 않으실 것이다.
아니다.
성령이 말하는 통로는 다양하다.
가장 넓은 통로가
성경을 통해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고,
그 이외에 환상이나 꿈, 영음도
다양한 통로의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는 성경지식이 아니라
해박한 성경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깨달음이다.
성경지식은 머리에 저장되지만
성경의 깨달음은 가슴에 저장된다.
머리에 저장된 성경지식은
자기의 의나 교만하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만,
가슴에 저장된 성경의 깨달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즉각 적용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깨달음이든지 아니면 신비적인 통로이든지간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그 뜻대로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의 깨달음을 알려면
성경지식을 쌓아둔 것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로서
성경의 말씀이 머리에 저장되지 않고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
환상이나 꿈, 영음으로
인도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신비스러운 현상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들도
얼마든지 사용하는 통로이기에
성령이 주시는 지혜인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나 환상, 꿈, 영음 역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깨달음과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명하게 알고 따라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성경의 지식은 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며,
각종 신비로운 현상들을 일으키는
악한 영에게 속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얽매어 사는 사람이 아니다.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지만
하나님이 삶을 인도해주시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일은 하지만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런 걱정과 염려,
근심과 불안함이 없다.
어느 곳에 살고 있게 되든지,
어떤 직업을 갖든지
하나님께서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시고 인도해시기 때문에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유를 꿈꾸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진 연약함과 한계
그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영을 존재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바람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왜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지를
알지 못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은
오직 하나님과 동행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의 주인은 선하시며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들어주시고
이루어주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그런 삶은
주인의 뜻 안에 살 때만 가능하다.
우리를 지으신 주인은
이 땅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그리고 평안하고 기쁘게 살다가
천국에 오기를 바라신다.
그런 삶을 누리는 자는
성령과 동행하는 영적 습관을 들여
쉬지 않고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이 바람의 아들이 되어
아무런 염려와 근심이 없이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오늘 아침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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