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을 시작하기 전의 나는 욕심덩어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게 적당한 욕심이었는지 아님 과도한 탐욕인지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자가 되어 폼 나게 인생을 살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은 꿈이지 않은가?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생각을 갖고 살게 된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 만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이나 직장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를 잡아 사업을 하든지 투자를 해서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성공적인 인생이다.
교회에 와서도 그 꿈이 사라질 리가 없다.
아니, 교회에 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인 능력으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을 몰랐던 시절이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때나
인생을 살아가는 목표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물론 교회에서는 기복적인 세속적인 축복의 가르침이 그런 기대를 더욱 부응시켰겠지만,
부자가 되고 성공해서 남보라는 듯이 떵떵거리고 살고 싶은 내 안의 탐욕이
그런 인생관을 정립시켰다는 것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생관이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은 물론 교회에서도
탐욕이 인생을 나락에 떨어뜨리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회사에 다닐 때도 누구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고,
사업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왜 실패한 인생이 되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영적인 가르침을 추구해야 하는 교회조차
희생적인 신앙생활만 한다면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부자가 된다는 말로 귀를 간질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무던히도 희생적인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새벽기도는 정기적으로 다니지 못했지만
주일성수에다 십일조도 성실하게 드렸고 교회학교 봉사도 십년이 넘게 했다.
게다가 특별한 요청이 있으면 빚을 얻어 헌금을 드릴 정도로 열심을 냈으며
기도원을 쫓아다니며 부르짖고 기도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한 것과는 정반대로 실패한 인생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비참한 삶도 드물 것이다.
끝없는 욕심을 추구하는 세상
어릴 적 학교에 가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듯 듣는다.
그 이유는 명문대학에 가야 좋은 직장을 얻어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 거라는 말로 결론지어진다.
“아니, 그 말이 무엇이 잘못되었지?”
“그럼, 찌질이처럼 사는 게 좋아? 성공해야 하는 건 당연한 말이지.”
물론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공정한 보상을 받는다면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세월이 변해도 학교시험에서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는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어도 탁월한 컨닝 능력만 있으면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컨닝에 성공하면 할수록 열심히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잊게 된다.
그렇지만 정작 수능시험에서 부정행위에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결국 처음부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는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기대하는 결과는 없다.
그러나 세상은 학교시험처럼 감독이 철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공정한 사회도 아니다.
영악한 욕심을 잘 관리하면 누구나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다고 교묘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할 수 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움켜쥐려 하고,
부자가 되는 일에 불의와 불법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공하려면 적당한 불의에도 눈감을 줄 아는 게 지혜라고 배운다.
크리스천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에 오면 정직을 수호신처럼 지키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상 사람과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세속적으로 살고 있다.
욕심을 채우는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교회의 직책이나 신앙의 연륜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내 부모도 다른 부모와 다름없이 부자가 되고 성공해야 하다고 가르치셨다.
나쁜 짓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았지만 세상에서 잘되고 부유하게 살아야한다는 것만은 변함없었다.
그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나 역시 폼 나는 인생을 그리면서
학교를 마치고 직장에 들어갔지만 인생은 생각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한 만큼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신통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형편없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세상적인 인생관은 신기루와 같이 환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얻을 수 있을 것 같아도 아무도 얻지 못하는 그런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고소득을 얻은 신분이나
수십억대의 부자들이 꿈을 이룬 것 같아 보여도
정작 그들은 여전히 행복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은 부를 얻어야 하고 더 많은 명예를 얻어야 하며
더 많은 성공을 누려야 한다고 말한다.
행복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다.
사실 나는 성공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지만
설령 어느 정도 얻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을 게다.
탐욕은 욕심 많은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의 숲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면 진실을 알 수 없다.
눈만 뜨면 우리를 세뇌시키는 수많은 광고에서,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최고의 인생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 속내는 자신들의 상품을 사주는 것이 인생을 만족시키는 법이라고 가르친다.
사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들의 거대한 광고의 포로가 되어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에 넘어가고 만다.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들을 벌어들이려면 고소득을 얻는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더 크고 너른 집, 명품으로 도배한 옷장과 신발장,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의 식사, 아름다운 풍광의 외국여행 등
이러한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면 어서 빨리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낸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복의 조건을 제시한 이들이
고매한 인격의 철학자나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성현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의 상품을 팔려는 광고주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잘 짜여진 각본처럼 끝없는 욕심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세상에서 내리지 않는 한 탐욕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역시 한여름 밤, 모닥불에 달려드는
어리석은 한 마리 나방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오랜 뒤에 깨달았지만,
안타깝게도 인생학교에서 너무 많은 등록금을 지불한 뒤였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보면
재빨리 다음 구절로 넘어간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커녕
실천할 생각조차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전도유망한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영생을 얻는 방법을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않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가르침을 요청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고 물어보았고,
그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뜬금없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온다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자 그는 괴로워하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우리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신다면,
당신을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아마 쉽지 않을 것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민하다가 떠날 것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왜 자신의 제자가 되려면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했을까?
그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면 여러 군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 한 예로, 그 유명한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중에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을 생각해보자.
그 씨앗은 안타깝게도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에 떨어져, 싹을 틔웠으나
햇빛을 받지 못해 줄기만 길어 늘어뜨린 채 꽃도 피우지 못하고
달랑 이파리 몇 개를 달고서는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해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마13:22)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염려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다.(마6:30~32)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평생 먹고 살 재물을 쌓아두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재물에 대한 유혹 역시 믿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재물은 돈이나 재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과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6:24)
왜냐하면 재물 뒤에는 우리의 탐욕을 이용하여
생명과 영혼을 빼앗으려는 사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이 부자를 무조건 거부하거나 증오하시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세상의 재물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다.(학2:8)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은 그 소유권이 아니라 관리권을 위임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할 것을 명령하시고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들어온 재물이 자신의 것인 양,
쾌락과 탐욕을 만족시키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면
악한 관리자가 되어 심판 날에 참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시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충성된 관리자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들도 교회에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고 남은 재물에 대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여긴다.
예수님이 부자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대부분의 부자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고
겸손하기보다는 교만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소개한 세리장 삭개오와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부자였지만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충성된 인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흔쾌히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참 드물다.
탐욕을 버리는 일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은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마6:21)
우리는 교회에 와서 영생도 얻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자도 되고 싶어 하지만,
둘을 동시에 얻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돈을 섬기는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영성학교, 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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