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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보다 ‘너’의 감정에 공감해야

007 RAMBO 2020. 9. 16. 08:42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139)

‘나’의 생각보다 ‘너’의 감정에 공감해야

 

 

“너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 돼서 안타깝지?"

 

부모가 이런 반응을 했다면

자녀는 자신의 본심까지 알아주는 부모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모와 더 많은 대화를 할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말은 해야 맛이요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사람의 혀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순다.”

 

영화 <생일>의 한 장면/NEW

 

이처럼 우리 속담에는

일상생활에서 대화를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대화를 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공손히’ 이야기하라는 정도로만 교육한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공손히 이야기해야 하지만,

공손하다고 해서 대화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는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말은 독백(獨白)이라고 한다.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비록 상대가 앞에 있지만

만약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일방적으로 한다면

실상은 독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이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상대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을 띠지만

사실은 자신의 생각만을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대화를 ‘집단적 독백’이라고 부른다.

 

비록 어른들끼리의 대화라고 할지라도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집단적 독백을 하게 된다.

 

상대방과 내가 동등한 존재 인정해야

 

대화(對話)는 ‘상대(對)에게 말하는(話) 것’이다.

대화를 잘하기 위한 첫 번째 요소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즉 상대가 나와는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그와 내가 대등한 관계라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비록 상대가 분리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철저한 ‘주종관계’에서 대화란 존재할 수 없다.

단지 명령을 내리는 윗사람과 복종만을 강요당하는

아랫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두 번째 요소는 ‘나’보다 먼저 상대

즉 ‘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상대가 나와 분리된 주체적 존재라는 것은

‘너’도 ‘나’와는 다른 독립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항상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세 번째 요소는 ‘생각’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나와 너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상대와 좋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뿐만 아니라 ’너‘의 감정을 함께 느껴야 한다.

 

즉 ‘공감(共感)’을 해야 한다.

공감은 ‘나와 네가 같이(共) 느끼는(感) 것’이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비록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너’의 감정을 당사자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이다.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 ‘너’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상대방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내용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반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잘 포착하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내용의 이면에 있는 감정에 반응해야 한다.

 

네 번째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말에서

‘너’의 본심을 알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상대의 본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본심마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자신과 상대에 대해

부정적 표현을 하는 경우에도 본심은 긍정적이다.

 

예를 들면, 연인 사이에 “네가 미워”라고 표현하는 경우에도

본심은 “네가 좋다”는 것이다.

 

비록 부부 사이에 다투는 경우에도

서로 부정적 감정을 빨리 털어내고

다시 긍정적 관계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본심이다.

 

우리의 본심은 긍정적이다.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비록 현실적으로는 실패를 하고 있지만,

그의 본심은 성공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못하는 학생도

공부 못하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다.

 

그도 속마음은 공부를 잘하고 싶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속마음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뿐이다.

 

만약에 하찮은 잔심부름을 거부하는 부하직원이 있다면

그(녀)는 마음이 나쁘거나 봉사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녀)도 다른 직원처럼 중요한 일을 맡아

열심히 일해 좋은 성과를 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본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인 것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본심을 알아줘야

 

정리하면,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먼저 ‘너’의 감정에 공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표면적 감정이 부정적이라고 해도

그 밑바닥에 있는 긍정적 본심을 알아주어야 한다.

 

만약 자녀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예를 들어보자.

“집은 너무 시끄러워. 공부할 마음이 없어.”

이 경우 자신은 뭐라고 반응했을지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란다.

 

“뭐가 시끄러우냐? 공부하기 싫으니

별 핑계를 다 댄다”와 같이 반응했다면

가장 첫 번째 단계에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오직 ‘나’의 ‘생각’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상대는 심리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상대가 자신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그래 우리 집이 시끄러우니 공부하기 힘들지?”라고 반응했다면

두 번째 단계의 대화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시끄러워 공부하기 힘들다’는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고 반응했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한 세 번째 단계의 반응은

“너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돼서 안타깝지?”와 같은 것이다.

 

이 반응에는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긍정적 본심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가 이런 반응을 했다면 자녀는

자신의 본심까지 알아주는 부모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모와

더 많은 대화를 할 것이다.

 

대화를 잘하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다.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대화를 잘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론을 알고 있고 잘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니다.

 

피아노의 구조와 악보 보는 법을 알았다고

피아노를 잘 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연습을 해야만

비로소 피아노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대화도 연습을 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를 잘했을 때의 기쁨을

반복적으로 맛보아야 한다.

 

기품 있는 대화를 통해

상대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