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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기질

007 RAMBO 2018. 12. 4. 03:04

택시를 탔다.
운전기사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었다.

13세때 중학교 가보겠다고 무작정 상경한 뒤
어언 30년이 흘렀다고 했다.

아이스케키 장사부터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다만 거지 노릇은 안했다고 했다.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잠잘 곳은 물론이고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 와중에도
거지의 무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굶어죽어도 동냥은 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어엿한 사장님인데

부러울 것 없으시죠?"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은근히 감동한 내가 덧붙였다.

'누가 뭐라고 할 이도 없고
오로지 자신만 열심히 하면 되는
21세기의 자유계약선수(Free agent)아닌가?'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이죠. 먹고 사는데 지장없고
취미생활도 간간이 하고 부러울 것 없죠.
근데 아쉬운 것이 있어요.

뭐냐면요. 제가 20대에 조금만 돈이 있었더라면,
세상 물정을 조금만 알았더라면…

아니, 아니에요.
진짜 떠돌이, 뜨내기 기질이 있었더라면
엄청 부자가 되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죠."


그의 설명은 이렇다.
그때 자기와 함께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또래 친구 가운데
큰 부자가 된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신나게 서울시를 돌아다니며
지금은 금싸라기가 된 강남땅을
'감을 잡고서' 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바로 밑의 동생도 '무작정 상경'하는 바람에
그 애를 먹여살리느라고
그 당시 평당 몇 천원에 불과한 땅 한 평도 못샀다는 것이었다.

"근데 재밌는 것은 진짜 서울 토박이들도 그랬다는 거죠.
운전하다보면 서울 토박이들을 가끔 만나는데
대부분 중심에서 밀려났어요.

"옛날에는 우리 집이 비원 바로 옆이었는데…"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곳을 보면 한마디로 후진 동네에요."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내 주변의 서울 토박이도 영 시세없는 동네에 산다.
'왜 그럴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외지에서 온 떠돌이들은
항상 머리를 써야만 살게 돼있어요.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또 여기저기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유심히 관찰하는 게 몸에 배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발품 팔고 유심히 보고 머리 쓰면
당연히 기회가 오죠.
그래서 강남땅도 사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서울토박이들은 아쉬운 것이 없고
다 안정돼 있다 보니
머리 쓰지 않고, 또 '이대로 가지 뭐…' 하다가
결국 어어하는 새에 밀려난다는 이야기였다.

말 그대로 유목민처럼 움직이는 인간만이
살아남고 부유해진다는 증거였다.

낯익은 얼굴, 조용한 생활,
편안한 일상을 원하는 이들은 밀려나고
낯선 얼굴과 함께 웃고 마구 휘젓고 돌아다니고

항상 일이 터지기 직전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부자가 전부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열심히 돌아다니는 바지런한 사람들에게
돈이 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 아닌가요?"

나는 그의 정연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발전요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