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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가장 미운 사람 된다

007 RAMBO 2020. 11. 16. 20:11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살면서 구질구질해지거나 비참해지는 일을

웬만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가능하다.

 

모든 일들이 그 때부터 시작이다.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어렵사리 마음의 틈을 조금 열어 보이는 순간,

혹은 서서히 내가 아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 늘어가는

그 지점에서부터다.

 

설레임과 기쁨은 계절이 바뀌고 나면

서서히, 때로는 예고 없이

나를 무릎 꿇리고야 만다.

 

‘너 그동안 많이 즐거웠지?’

하며 비웃기라도 하듯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최고의 감정과 최악의 감정은 이어져있다.

 

사랑에 관한 짓궂은 모순은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미워할 일도 없다.’라고.

 

배우자와 한바탕 큰 싸움을 벌이고 난 뒤,

‘어떻게 저런 인간을 내가 좋아했지?’

라고 후회한다던가,

애인과 헤어지고 난 후

그(녀)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는 것도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그럼 도대체 연애를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라는 의문이 든다.

누구도 남을 미워하면서 살고 싶진 않으니까.

 

글쎄.

정답이 어느 쪽이든

결국 빠질 사람은 빠지지 않을까.

 

 

단 한 사람의 지지만으로 삶이 거뜬해지는 경험


나 또한 결국 빠질 사람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나의 경우, 좋아하는 사람과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하면서 갖게 된

긍정적인 마음의 변화는 자존감이었다.

 

그렇다.

문제의 자존감! 

 

툭하면 너덜너덜해지곤 했던 나의 자존감은,

지금의 남편인 당시 남자친구와의 결속력이

굳건해져감에 따라 함께 단단해졌다.

 

이제는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변화인 것을 잘 안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우리는

사람들의 비판이나 의견에

쉽게 흔들린다.

 

흔들리기만 하면 다행인데,

걸핏하면 고꾸라지는 것이 문제다.

 

그런데,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나를 굳게 믿어주고 지지해주면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이 거뜬해지는 것이다.

 

‘이 사람 하나면 충분해.’,

‘이 사람 하나만 날 믿어주면 돼’라는 생각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마치 도처에 총을 든 사람들이

나를 겨누고 있는 전쟁터에서

방탄복을 입은 무적이 됐다고나 할까.

 

그만큼 어느 정도 주변의 일들에는

무던해지게 된다.

 

그러면 남들 눈치 보느라

마음 졸이던 시간이 줄어들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자연히 더욱 효율적으로

일상을 영위하게 된다.

 

그런 시간이 쌓이다보면

‘사람들의 비판이나 의견 따위를

크게 겁내지 않아도 되는 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남들이 뭐라해도 스스로가

자신을 믿어주게 되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야말로 자존감이 성큼 자라난 것이다.

얼마나 바람직한 변화인가.

 

그러나 위험은 여기에 있다.

자존감을 일으켜준 척추같은 존재,

내 유일한 세계,

내 우주의 중심이었던 그 존재가

신이 아닌 이상, 나를 실망시키거나

슬프게 하는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아프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너 하나면 충분해’라던 무적의 마음은,

동시에 그 한사람으로 인해

더 크게 다치고 상처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한다.

 

유일하다 믿었던 그 사람과

다툼이 생겼을 때,

내 마음을 지지해주던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보다

훨씬 따갑고 고통스럽다.

 

흥미로운 것은 갈등의 원인이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매력’의

연장선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친절하고 상냥해서 좋아했는데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서 문제가 된다거나,

까탈스럽지 않은 둥글둥글한 성격이 매력이었는데

너무 우유부단해서 답답하게 만든다거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반했는데 과하게 넘쳐서

신중함이 부족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매력이

나를 화나게 하는 웃픈 상황을 마주한다.

 

갈등이 수습되지 않아,

안타깝게도 원치 않는 이별을 겪게 되기라도 하면,

우주의 중심을 가졌었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우주의 중심이 사라지는 경험.

나의 우주로부터 내쫓아지는 경험.

그것은 고통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에는

‘사랑’을 택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에게 끌리고,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에게 마음을 열고,

기꺼이 손을 내밀고 어깨를 내어주고 입을 맞춘다.

그렇게 깊이 교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사랑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강렬한 욕구를

이겨낼 도리가 없다.

 

집단에 소속되어야 안정감을 느끼고,

SNS의 좋아요 하나에 기분이 좌지우지 되는 것도

모두 애정욕구의 연장선이다.

 

사랑받고 온전히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에게 간절하다.

 

그 욕구에 의연해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이 가장 긴요했던 시기

즉, 유년기에 이미 충분히 사랑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애정의 욕구는

일생에 걸쳐서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부모에게서 받던 사랑이 또래관계로

그 다음은 이성친구 또는 배우자로 옮겨간다.

 

어렸을 때 충분히 충족되지 않았다면

그 공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지고 절박해진다.

 

다시 말해서 그 공간의 모양만 다를 뿐

모두가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지?’ 가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을 향해

엄청난 증오와 복수심에 차올랐던 것은,

그가 캐서린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고아인데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아본 적 없던 히스클리프에겐

캐서린이 그야말로 ‘유일한’ 우주였을 것이다.

그녀의 배신이 훨씬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게 분명하다.

 

결국 애증과 복수심을 밀어붙여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맺는다.

 

그들이 어린 날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시작되지 않았을 이야기일테다.

 

한 때는 이 작품을 지나치게 거칠고

과장된 사랑이야기라 생각했었지만,

한편으로는 간만 보고 썸만 타다 끝나는

요즘의 사랑에 비하면

몹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김없이 사랑을 태운 히스클리프의 이야기가,

계산하느라 바쁜 두뇌게임같은 요즘의 사랑이야기들보다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금 이 사람에 대한 마음이

미움이나 증오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밖에 없다는 듯이 푹빠져 사랑하는 것 아닐까.

 

일단은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일으키고

성큼 자라나야 할 게 아닌가.

 

단지, 비극으로 끝맺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거리를 조율해야겠지만 말이다.

 

방어만 하다 끝나는 연애로는

자존감은커녕 무엇도 일으킬 수 없을테니.

 

그래서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란다.

오늘도 기어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꼭 그만큼의 크기로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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