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참으로 요즘 사람들은 행복에 목을 맵니다.
행복하게 살려고 무진장 노력합니다.
그러나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행복에 관한 그릇된 가치관의 대표적인 영화는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평이합니다.
어렵게 살던 윌 스미스가 열심히 일해 인정을 받고
결국, 자신의 회사를 차려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영화는 주장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왜곡된 행복 관에 젖어 오늘도 백만장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 크리스천들조차 이런 가치관에 물들어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대학 가야지”
부모들이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열풍의 중심에는
자녀가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그래야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즉.. 그들의 행복 관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성공..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가치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크리스천이고 넌크리스천이고
거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늘도 행복한 삶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행복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행복은 당신에게서 더 멀리 떠나간다는 것을..
성경은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게 된다고 알려줍니다.
행복해지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 욕심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현대인들의 행복의 개념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 남들 위해 군림하는 사람..
더 편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 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남을 짓밟아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돈은 내가 벌면 남은 잃어야 합니다.
일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다른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습니다.
내가 군림하면 누군가는 군림을 당해야 합니다.
내가 편하게 살고자 하면 누군가는 나의 편함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이 누리려는 행복은 모두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이기주의입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반드시 죄를 낳습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행복을 위해 분투하면 할수록 그런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비례해서 높아집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인은 정작 행복을 위해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는 죄의 노예가 되어 도리어 행복을 빼앗기는 자리로 내려앉게 된다..
참 뒤통수가 띵해지는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죄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의 노예가 안 되려면
욕심을 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면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답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면 됩니다.
즉.. 기쁨도 삶의 일부
고난도 삶의 일부
즐거움도 삶의 일부
슬픔도 삶의 일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전부 우리의 삶의 일부로 담담히 받아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뻐도 그 기쁨을 계속 가지려고 하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 힘겨움을 애써 떨치려고 하지도 않으며
그저 주어진 삶에서 기쁨이나 고통이 떠나갈 때까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는 삶
그것이 진짜 행복한 삶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70억의 인구가 있습니다.
70억의 인구 중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며 역시 웃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늘 웃음과 울음이 공존하는 평행선 게임입니다.
따라서 한쪽에 집착하는 것은 욕심이며 그것은 죄를 부르게 됩니다.
늘 웃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의 창조법칙에 위배 되기 때문입니다.
웃음이 나의 삶이듯
울음도 소중한 나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울음을 인정하는 삶.. 고통을 인정하는 삶.. 답답함을 인정하는 삶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생의 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울음의 삶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면서 더 괴로워합니다.
고통의 삶을 벗어나지 못함에 있어 고통스러워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만약 울음을.. 고통을.. 답담함을 그냥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의 삶이라고 진실로 인정할 수 있다면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보다 훨씬 더 영혼이 평안해질 겁니다.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암과 친구가 되라.. 그러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
저는 영혼과 육이 원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육의 고통이 암이라면
영의 고통은 울음이 있는 답답함과 곤고일 겁니다.
그러나 암과 친구가 되면 암을 치료할 수 있듯이
영의 고통과 친구가 되면 고통이 치유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을 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고
내일의 것은 내일 염려하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이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삽니다.
내일은 오지 않은 시간이며 공간입니다.
따라서 오늘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내일을 걱정하고 근심해도 결코 내일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유한하기에 그저 오늘만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살 수 없는 내일을 염려하며
오늘 괴로움 가운데 몸을 웅크리는 것은
다소 어리석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 아무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고민해도
결국 살 수 있는 시간은 오늘이라는 바로 지금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면 됩니다.
내일을 미리 살 수 없다면 내일의 걱정도 내일의 슬픔도 내일의 괴로움도 지금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경험한다면 그것은 실제가 아닌 내 생각이 만든 허상일 뿐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염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죄입니다.
결국.. 결론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귀결됩니다.
내일의 슬픔도.. 내일의 괴로움도.. 내일의 걱정도.. 생각지 않고
오늘의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최대의 원동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절대자께서 나의 주군이며 나의 아버지라는 믿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다는 믿음
그분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아픔도 내게 필요하기에 주신다는 믿음
내일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도 그것조차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일 거라는 믿음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앙이
내일이 아닌 오늘만 살게 해주는 진짜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행복이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행복하려고 돈을 많이 벌 필요도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 공부를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행복은 극단적인 하나님 신앙에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너 미쳤어.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라며 비웃어도
하나님을 믿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 신앙으로 오늘을 살 때
행복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신비였던 겁니다..
그러니 행복을 찾으려 애써 노력하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을 그분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담담하게 잠잠하게 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사십시오..
오늘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운 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오늘이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렇게 오늘을 사십시오.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바울의 고백을 끝으로 전합니다.
[빌립보서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출처 : 회복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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