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은 해군사에 치욕으로 기록될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원균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소나무 아래서 왜 병사에 칼에 맞아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순신이 4년동안 피땀으로 이루어 놓은 한산진의 장엄한 모습은 한 줌의 재로 변해있었다.
게다가 수년간 훈련시킨 아까운 정예병 수천 명이 칠천량 앞바다에 억울하게 수장 되었고,
피땀 흘려 건조한 거북선과 170여척의 전함,
그리고 수년동안 마련해온 전투장비들 까지 일시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제 조선에는 수군 자체가 없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적은 의기양양하여 전에는 손도 대지 못하던 전라도 까지 손아귀에 넣으려고 바삐 움직였다.
한편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도 조선 수군의 소식은 차례로 전해지고 있었다,
7월14일 원균함대의 출진과 15일 패전소식을 비롯해
16일 조선수군 400여 명이 살육당한소식,
그리고 18일에는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그는 모두 듣고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한 선조와 조정대신들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
의 머리속은 오직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 뿐이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균이 패전한 연해안 쪽으로 말을 달렸다.
선조가 이순신에게 삼도 수군 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내렸으나 한산진은 적에게 넘어간 상황
어디에 가서 부임하며 게다가 당장 거느릴 군사도 없고 지휘할 전함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허울뿐인 통제사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고
그냥 재 임명장 한 장만 덜렁 주었다.
자력으로 새로운 요충지를 찾아야 했고 도망간 군사를 불러 모으고
부서지지 않은 배들을 거두어 새로운 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이순신은 전라도 지방을 말을 따고 순회하며
군사 일부와 전선 10척을 모아 8월19일 통제사 취임식을 취렀다.
이순신은 330킬로미터나 되는 전라도 내륙 지방을 순회한 뒤에야 부임할 수 있었다
사실 이순신이 통과한 주요 읍.성들은 그가 떠나자 마자 곧바로 적에 점령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8월23일 이순신은 토사곽란으로 고통을 겪는다.
수년간 전쟁을 치르느라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한데다
정유년에 투옥된뒤 고문 까지 받아 당시 그의 몸은 무척 쇠약해져 있었다.
이무렵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홀로 빈약한 전선과 패잔병등을 데리고
의지할 곳 없이 해상을 떠돌 것이 아니라,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 적을 막으라 명령했다.
수군 자체를 아예 폐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러자 이순신은 천하에 명언 한마디를 남긴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읍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읍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후 조정의 수군 페지론은 잠잠해졌다.
이순신은 밀려드는 적의 대선단과 운명의 일전을 겨뤄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그리하여 우선 어디서 적과 최후의 교전을 해야 할 지 깊이 생각했다.
우리의 군사의 전함은 불과 판옥선 12척인데 적의 전함은
대형선인 안택선과 중소형 전선을 합쳐 400척에 이르렀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그 10배가 넘는 적과 싸우자면
특별한 지형적 이점을 얻지 않고는 애초 승리를 기약할수 없었다.
이순신은 명량(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는 해협)을 생각했다.
명량은 별칭으로 울돌목이라 불리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바다목이 좁고 물살은 무척 세고 빨라 조수의 흐름이
폭포와 같고 그 우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특이한 지역이다.
그래서 100여척 정도를 넘지 못할 것이고,
아군은 그들만 상대하여 싸우게 될것이며 전함의 열쇠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또 울돌목은 시간에 따라서 조수의 흐름이 빠뀌는 곳이라
이것만 잘 이용해도 지리를
모르는 적을 혼란시켜 능히 적은 군사로 많은적늘 깰 수 있다.
이리하여 울돌목이 마지막 전투 장소로 결정되자,
이순신은 9월15일 벽파진을 떠나 조수를 타고 울돌목을 지나
그 윗머리에 있는 우수영 앞바다에 진을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전략상 최악의 경우에 선택하는 일종의 배수진을 치고자 한것이다.
전투가 임박해오자 그는 피난민을 타일러 뭍으로 올라가게 했다.
그러고는 그날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놓고 저 유명한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生 死卽必生)" 의 준엄한 훈시를 했다.
그 때 이순신의 심정은 어떠 했을까?
울돌목에 친 진형은 일종의 배수진이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승리란 꿈도 꿀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세운 비장한 전략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조선이 이기고 자신이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지성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그날밤 이순신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이렇게 하면 진다"
하고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인 9월 16일 ! 마침내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비한 해전이 벌어진다.
이른 아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장 우리가 진을 친 이곳 우수영을 향해 들어온다' 는 보고를 받는다.
이순신은 이미 전투 구상을 마친 터라 곧 여러전선에 명령해 닻을 올려 울돌목 쪽으로 나아갔다.
조선 전선의 후방으로는 살길을 찾아 이순신에게 온
피난민들의 어선 100여척을 뛰 따르게 해 허장성세를 이루었다.
드디어 그날 아침,예상했던 대로 적선은 조류의 흐름을 타고 울돌목으로 줄지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왜의 선단은 구루시마,가토,도도 등이 이끄는 최정예 수군이었다.
끝도 없이 다가오는 적함을 보자 일렬로 서서 적을 기다리기로 했던 여러 장수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 하는 것을 낙심하여
그 자리를 회피할 꾀만 내는데,
특히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700미터)이나 뒤쳐져 있었다.
전략상 처음에는 우리 배 쪽으로 밀려오는 빠른 물살을 버텨가며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힘껏 노를 저어 나아가서 닻을 내리고 적을 기다려야 함에도,
김억추는 이를 따르지 않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조류에 밀려 뒤처지게 된석이다.
사실은 이때 김억추만이 아니라 다른 장수들도 겁 먹어 1마장 가까이 뒤에 처져 있었으니,
모두가 소극적으로 도주하는 셈이었다.
오로지 이순신이 탄 기함만이 외로이 선두를 지키며 바삐 노를 저어 울돌목 한 가운데로 나아갔고,
적 앞에서 닻을 내리고는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과연 울돌목으로 들어온 적선은 예상대로 400여 척의 전함 중 중소형 전함133척이었다.
조선의 전선 판옥선
적들은 기함을 에워싸기 시작했다.기함의 조선수군은 다가오는 적 함대를 향해
지자포 와 현자포등 각종 총통과 화살을 마구 쏘아 댔다.
이순신은 그야말로 병법에 있는 그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두지휘에 나섰고 ,
두려워 하는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데 전력을 다했다.
탄환이 폭풍우 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위에 촘촘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적들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났다만 반복했다,
울돌목의 폭이 불과12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대장선 한척으로 울돌목에 들어온
수십 척의 적 선단을 일정시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이 끝없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들어와 형세가 어렵게 되자
기함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빛도 점점 겁에 질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조용 하면서도 힘차게 군사들을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감히 우리 배를 침법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이대로 가다가는 중과부적으로 패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
군의 사기를 생각해 특단의 조치를 단행하기로 했다.
이순신은 이어 참담한 심정으로 나팔을 불러 중군에 군령을 내리는 기를 세우게 하고,
또 초요기(군사를 부르는 깃발)도 세워서
뒤에 처져 있는 여러 장수를 불렀다.
거제 현감 안위의 배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왔다.
이어 중군장 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도 차차 지휘선 가까이 다가왔다.
이순신은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 간다고 해서 어디가서 살 것이냐?"
"예 ,어찌 감히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읍니까?"
이순신의 위엄에 찬 질책에 안위는 황급히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어 김응함에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당장
"응함아,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해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것이지만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든다"
그러자 김응함도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기 시작 했다.
그때 적장이 대장선에서 휘하의 배2척에 지령을 내리자
적군들이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들이 붙듯이 달려 들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탄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모난 몽둥이와 긴 창으로 치고 막았지만 마침내 기진맥진해졌다
부하의 배가 위급한것을 본 이순신은 급히 뱃머리를 돌려 그 쪽으로 쫓아 들어가서는,
총과 화살을 빗발치듯 마구 쏘아 적선 3척을 깨고 안위를 구했다.
적선 3척이 모두 엎어지자 송여종,정응두 의 배가 뛰따라와서 합력해
적의 대장선을 향해 대포와 화살을 퍼부었다.
그림을 수놓은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적장(구루시마)이 대장선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졌다.
이순신이 군사를시켜 갈고리로 낚아 올려 몸뚱이를 토막 내 자르자
적의 기운은 순식간에 꺽이고 말았다.
그동안의 물살은 완전히 바뀌어서 이제는 아군이 순류를 타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조류의 변화가 온것이다.
물살을 뒤에 업고 이순신의 선단은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조류에 밀려가는 적을
빠른 속력으로 쫓아 압박하며 지자 현자포를 쏘아 대는데 그 소리가 산천을 뒤 흔들었다.
적의 함선 31척은 모조리 불타 깨졌고,나머지 적함은 멀리 도주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날 높은산으로 피신한 수많은 사람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왜적선은 바다를 가득 메워 바닷물이 안보일 지경인데
조선의 배는 12척이라 기가 막히고 겁에 질려 통곡했다.
"우리는 통제사만 믿고 왔는데,
오늘 형편이 이러하니 이제 어디로 간단 말인가"
패전 직후에 바로 엄청난 대적을 만나고 말았으니,
아무리 이순신이라 한들 대포가 터지는 검 붉은 불속에서
어찌 살아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전투가 끝나고 연기가 걷힌 뒤에 보니
적선은 물거품처럼 다 없어졌는데 조선 전선들은 하나도 상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위에 둥실 둥실 떠 있고 그 가운데 '조선삼도수군통제사'라고 쓴 큰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는것이 아닌가?
피난민들의 통곡소리는 이내 환호성우로 바뀌어 진도 우수영의 천지를 뒤흔들었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을 무찌른 명량승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 되었다.
일본인이 그린 이순신 장군
명승첩으로 조선 의 전함은 단 한척도 파손되지 않았다.
다만 5명의 전사자와 한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이날의 승전으로
조선 수군의 칠천량 전투의 패배(원균지휘전투) 를 딛고
일어나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되었고,잠시 잃었던 남해의 제해권을 다시 탈환하게 된것이다.
반면에 왜의 해군은 서진 계획을 포기 한채 다시 동쪽으로 진을 옮겨야만 했다.
선조는 모든 장수에게 축하선물과 벼슬을 올려주고 포상하였으나
이순신에게는 아무런 포상을 하지 않았다.
이같은 선조에 처사에 영의정 양호는 편지를 보내어 이순신을 위로하며 비단 한필을 보내주었다.
이순신은 선조의 처사에 아무런 대꾸도,불평도 하지 않았다.
싸움터에서는 언제나 진두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분투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는 또 언제나 모든 전공을 부하 장병들에게 돌릴 뿐이었다.
지극한 정성으로 자기 할일에 전념한 사람은 그 일 후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는 담담한 법이다.
이순신은 수도를 마친 성자와 같았고, 여러 장수는 그런 그를 신으로 여겼다.
출처: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저자:김종대
펴낸곳: 가디언
http://cafe.daum.net/hsy7743/GkUU/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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