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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의 특징과 영적 점검 - 자기를 사랑하며

007 RAMBO 2018. 7. 21. 08:41

“네가 이 세대를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② 돈을 사랑하며

  ③ 자긍하며

  ④ 교만하며

  ⑤ 훼방하며

  ⑥ 부모를 거역하며

  ⑦ 감사치 아니하며

  ⑧ 거룩하지 아니하며

  ⑨ 무정하며

  ⑩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 참소하며

  ⑫ 절제하지 못하며

  ⑬ 사나우며

  ⑭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⑮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⑰ 자고하며

  ⑱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특징이다.

무엇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는 말씀을 보고 혹시

‘내 주변에 있는 누가 여기에 제일 많이 해당될까’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성경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현재적 음성이다.

이것을 잊어버림이 불행의 시발점이다.

여기 기록된 말씀 중에서 내게 해당되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이것이 말세를 사는 우리들, 바로 나의 모습이다.

또 이 세대의 전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세대 속에 사는 우리에게 성경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곧 돌이키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여기에는 진정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 포함된다.

이제 구체적으로 특별히 번의 말씀을 가지고 스스로를 점검하기로 하자.

  

① 자기를 사랑하며

 

기독서점에서도 간혹 자애,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책자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없다.

단지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임을 아시는 고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네 몸을 네가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네 이웃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가정

그리고 가진 것과 자유 의지마저도 기꺼이 내어놓고 포기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음에도, 홀로 서기를 요구하신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단독자로서, 당신 앞에 벌거벗고 서기를 원하신다.

또 반드시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는 혼자 서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말씀하셨다.

“너는 일대일로 나를 만나고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인이 아닌

내 안에서 홀로 서는 신앙인이 되라.”

 

자기 사랑은 죄의 시발점이자 죄의 구체적인 내용이며,

끊임없이 죄를 유발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 자기 사랑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

 

무엇을 생각하고 행함에도, 무엇을 정하고 따름에도

단연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된다.

여기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들어 설 공간은 전무하다.

 

자기 사랑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

제일 큰 우상이고 버리고 포기하기 어려운 우상이다.

모든 죄가 자기 사랑에서 나온 죄악의 구체적인 모습일 뿐이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말씀을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적용해 보라.

 

자칫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가운데 빠지기 쉬운 함정이 ‘모델화’이다.

믿음의 모델, 고난의 모델, 순종의 모델, 헌신의 모델, 인내의 모델 등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모세는 역시 대단한 인물이야, 그러니 순종의 모델이지.

또 아브라함이니깐 그 일이 가능했지, 역시 대단한 믿음의 모델이다.

요셉을 봐, 베드로는 어떻고 정말 사도 중의 사도야.

바울의 헌신과 고난의 삶은, 우리에게 훌륭한 선교의 모델이야...

 

그 결과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믿음의 위인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들의 믿음과 헌신과 고난을 모델화시킴으로,

우리는 그들을 칭송하고 기념하기에 열심이다.

이럴 때 그들은 한갓 기념비적인 인물이 될 뿐,

영적인 의미와 현재적 교훈은 사라진다.

 

루터와 칼빈 그리고 수많은 종교개혁자들과 웨슬리의 삶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의 회복을 위해서,

그 어두운 시대를 밝히도록, 그들을 불러 세우셨다.

그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대단한 헌신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비록 마른 막대기보다 못한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원하시면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분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한 믿음의 도구가 된다.

누가 크냐 다투지 말고, 높은 곳에 마음을 두어서도 안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를 소원하는가?

 

먼저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한다.

날마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바울처럼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실패하고 쓰러지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결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고,

종의 자세로 겸손히 그 앞에 엎드려야 한다.

아버지의 자비에 목말라야 한다.

주님의 발 앞에 모든 소원을 내려놓고,

그분의 처분만을 기다려야 한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아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0, 11).

 

참으로 자기 사랑이라는 큰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채움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요 끝이다.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성령 충만을 경험한 사도들과 초대교인들의 생활이 그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로 새롭게 된,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들도 있다.

 

비워지고 자기부인으로 채워질 때,

진리의 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 일이 나로부터 시작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인데,

사람들은 참된 행복과 자기 사랑을 자주 혼돈한다.

그 결과 올바른 목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참된 목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하나 됨, 완전한 연합을 추구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야 자기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다.

 

자기 사랑이 죽을 때 예수 사랑이 살아나고,

내 속의 소욕을 버릴 때 자기 부인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첫 번째 일이다.

참으로 ‘끊어 주시는 은혜’에 애타는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자기 사랑을 버리고 비운 자리에,

예수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기도드리자.

  

 

기도하오니,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당신의 불 같고 불 같은 권능으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끊어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 형 틀에서 죽으신

당신만을 사랑하며

죽게 하소서.

 

하나님, 이 어두운 세대에

주의 밝은 빛을 던지는 자로

저를 이끄소서.

예수를 닮기 원합니다.

제 삶의 모든 것들이

성령으로 채움 받기 원하고

당신의 이름을 높이기 원합니다.

 

저를 비워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은혜로 채우소서.

제 삶을 받으셔서

주님의 뜻만을 이루소서.



- 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