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딴지일보에서 펀 글을 손질했습니다.
1994년 6월 23일. 보스턴 폭스보로 스타디움.
한국 대 볼리비아. 94 미국 월드컵 두 번째 게임.
한국은 이 경기를 꼭 잡아야 했다.
한국은 강적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2대2로 비기는
일대 파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국팬들은 흥분했다.
이제, 두 번째 게임인 이 날의 볼리비아전만 잡으면,
한국 축구팬들의 절대 염원이 된 월드컵 16강 진출이
사상 최초로 사정권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슛 두 세 번이,
골문 바로 근처에서 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골대 너머 허공을 갈랐다.
월드컵 최초의 16강도 그렇게 날아갔고.
그 결정적인 찬스 두 세 번을 허공에 '똥볼'로 날린 스트라이커,
그가 황선홍이다.
황선홍.
그는 그날 이후
한국 축구의 역적이 된다.
사상 최초의 월드컵 16강 기회를 똥볼로 날려버린 역적.
탁월한 스트라이커이며
아시아 최고의 골잡이로 평가받는 그였지만,
그 한 게임으로 그는 끝없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 야유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아냥거렸던가.
똥볼은 곧 황선홍이었다.
누군가 시합 중 똥볼을 찰라치면
"니가 황선홍이냐"라는 '관용어구'가 뒤따라 붙었다.
황선홍이 혹여 시합 중 작은 실수라도 할라치면
" 역시 넌 안돼 " 라는 소릴 들어야 했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국내용이라느니, 근성이 없다느니, 똥볼만 찬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작년 가을,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김병현이 그렇게 엄청난 게임을 연속 두 번 날리고 나서
한국의 팬들은
미국의 언론이, 아리조나의 팬들이,
그의 팀동료들이 그에게 어떤 소리를 할까 조마조마했었다.
물론 패배에 대한 질타는 있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게임의 운용 그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운용을 한 감독을 비판할 망정,
김병현을 비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과연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언론은 그랬다.
팬들은?
IT'S OK KIM. I STILL ♥
THIS WIN IS FOR KIM
WE WILL BE OK. I ♥ KIM
김병현을 응원하는 플랭카드 내용들이다.
참.. 한국팬들로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큰 게임을,
그것도 다 이긴 걸 두 게임이나 연속으로 날렸는데도,
계속 널 사랑하겠다니..
김병현을 몰아 부치지 않으니 좋긴 하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다.
같은 팀의 투수인 Randy Johnson은
11월 5일 NBC의 간판 토크쇼인 Jay Reno의 Tonight Show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He`s gonna be a phenomenal closer and he already is.
But he`s gonna be bigger and better."
"그는 정말 경이적인 마무리투수가 되겠죠.
사실 이미 그렇기도 하구요.
하지만, 앞으로 그는 지금보다도 더 크고 더 뛰어난 선수가 될 겁니다."
7차전을 이겼기에
김병현이 결국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한다.
맞는 소리긴 하지만,
격려와 위로와 응원은 7차전 승부 이전에 이미 쏟아졌다.
우리 스포츠 문화에,
그들에게 있는 것 중
상대적으로 모자라는 것이 분명 있다.
비단 스포츠 뿐만이 아니다.
우린 세대를 초월해 가져본 천재와 영웅이 별로 없다.
이유는?
천재적, 영웅적 자질이 있는 사람이 워낙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배출한 유일한 세계적 인지도의 축구선수가 차범근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아시아출신 축구선수이기도 하다.
그런, 차범근을
세계에서 가장 우습게 여기는 나라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나라가 아니고.
박세리가 2년 징크스로
오랜 기간 우승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받았던 비난을 기억하시는지.
겉멋이 들었다느니. 돈맛이 들었다느니. 건방져졌다느니...
실수하고 실패할 때
우리가 오히려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보호해준
우리네 천재와 영웅들이 얼마나 있던가.
기억 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라.
웬만한 실수나 의구심에는 꿈쩍도 않고
언제나 자기편이 되어줄 것임을 알기에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분발하게 만드는
그런 애정,
그런 종류의 관심과 애정을
우리네 천재와 영웅들은 받아본 적이 없다.
반면,
우리가 배출한 천재와 영웅들을
실수하고, 실패했다고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박살내버린 경우,
그 얼마나 많았던가.
해방 후 우리 사회가 지금껏 성장하면서
사회 전체가 강퍅하며
총체적인 집단 애정결핍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길을 달려와서 그런 걸까.
이렇게까지 범국민적으로 옹졸할 순 없다.
이 범국민적 옹졸함,
이 집단적 애정결핍의 뿌리가 무엇이든,
이젠 제발 이런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 그만들 하자.
무조건 비판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최소한 비판하는 만큼은
격려하고 응원해주고 도닥거리고 감싸주자.
우리가 그들을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하나.
걔네들 전부 우리 애들이다.
영웅도, 천재도,
가질 자격이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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