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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들

007 RAMBO 2018. 12. 22. 07:33

성도들을 가장 넘어지게 하는 것이

섹스, 권력과 돈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섹스의 문제입니다.

 

욕정의 힘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커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실족하게 해왔습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욕정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아버지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남자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문고리 잡고 일어 설 수만 있어도

여자를 조심해야 하다”고 말 했더니, 어느 연세가 지긋하게 드신

수강자 한 분이 손을 들고 제가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문고리 잡고 일어 설 수만이 아니라

옆으로 뒤집어 누울 수만 있어도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모두들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너무나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다고 하신 다윗도

밧세바에게 빠져서 결국 그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성경에서 여인의 유혹을 확실히 물리친 사람의 예로 요셉이 등장 하는데

물리친 그 방법이 가장 간단하지만 또 한편 가장 힘들기로 합니다.


그 방법이란 유혹의 현장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여인의 유혹을 이기려면 삼십육계가 최고라는 것이지요.

그 자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으면 그 유혹을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공한 존경 받는 성직자들도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아

결국 유혹에 져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가슴 아픔 일을 보아 옵니다.


유혹의 자리를 그리워하지 말고

과감히 여지를 주지 않고 피하는 길만이 이기는 길이지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실수에서 자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 실수를 겸손히 인정하고 참회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쓰시지요.


물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자신을 돌아 보면 알 수 있지요.


저도 잘못한 후 누가 지적하면

먼저 변명이 쉽게 튀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내 스스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지요.

또 자존감이 높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것은

가식 없이 자신을 드러내 놓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겸손히 인정하고 그 대가를 기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주시지요.

 

 

두 번째는 권력입니다.

 

권력의 생리는 한번 잡으면 놓기 싫은 것이지요.

그 이유가 명예이든 그에 따르는 돈이든 남에게 줄 수 있는 막강한 힘이든

끝까지 붙잡으려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보기 흉한 끝을 맺게 됩니다.


권력은 그 힘으로 인해 부를 축적할 수 있기에

돈의 문제와도 직결 됩니다.


권력의 부패를 없애겠다고 끝까지 투쟁하던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가 그지 없습니다.


이런 권력은 정치적이 자리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안수집사, 사역 팀장, 장로, 담임목사, 총회장 등

모든 조직의 장 자리는 그 권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같은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장 자리를 놓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잡음이 들려도 끝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종의 몸으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게 되지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기에 또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자리를 자신이 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일주일 기도원에 다녀 온 후에 결심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그것은 은연 중에 기도의 응답으로 결심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합당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린 결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

실족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아마도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을 줄 압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오천명을 먹이신 후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고민하시며 기도하시고 결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해도 이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아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 가셨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90%, 아니 100%가 다 원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산으로 피하시어

다시 하나님과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눈이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지요.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 것 같습니다.


무리의 마음이 가난해 졌다면, 겸손해 졌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칠 수가 없을 것이지요.


고민 가운데 멘토들과도 상의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받아들이기 힘든 조언을 하는 멘토의 말 보다는

자기 생각에 맞는 멘토의 조언을 받아들여 세상적인 결정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저지른 실수와 비슷한 과오가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제가 다녔던 신학대학원에 목회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있었는데

그 분의 삶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미국 중부 외딴 소도시에 개척을 해서 십 년 동안 한 5-600명 정도의 중형 교회로 성장시켰지요.

그러다가 교회 시설의 문제로 한 불만이 있는 장로와 부목사로 인해

교회가 어려워지기 시작해서 드디어는 교인의 1/4 정도가 떨어져 나갈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 말씀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것이고 그 교회가 쪼개진다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다시 찢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셨지요.

그래서 다시 기도한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 되게 하느냐였지요.

 

아무리 기도하고 생각해도 두 분은 돌아 올 것 같지 않아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개척한 것인데 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나가야 하나,

억울한 생각일 들 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지요.


“이 교회는 네가 개척한 것이 아니고 내가 세운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회개하며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동안 서로 큰 소리로 싸운 것도 아니고 서로의 선을 넘지는 않았기에

극구 말리는 당회에 사표를 쓰고 교회와 두 사람을 축복하며

교회를 떠나 멀리 서부로 갔습니다.


떠날 때 가슴이 아팠지만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놀랍게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지요.


아마도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지만 (마7:14)”

그 길을 가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갑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서로가 축복하며 헤어졌기에

그 교회는 계속 선교비를 보내주며 여러 사역을 지금까지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이 노교수님과

지금도 교제하며 많은 은혜를 받고 있지요.


하나님의 방법대로 순종하며 자기를 버릴 때,

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것을 봅니다.

 

 

세 번째로 성도를 넘어트리는 것은 돈의 문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은 필수적인 것이고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다 퍼져있기에

다른 어느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문제만은

우리가 무덤에 갈 때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기분 나쁠 때마다

준 것들을 다시 내어놓으라 말하기 때문에

아버지 임종 전까지 병상에 잘 안 갔다는 말도 있습니다.


진실 여부는 알 수 없겠지만 돈의 문제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잡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지배하고 조정하지 못한다면

돈의 힘은 곧 우리를 오히려 지배하고 조정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돈에 따라 좌우되기 시작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래의 설계도, 배우자의 선택도,

친구의 선택도 모든 관계의 형성도 돈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목회 현장에서도 이런 문제들은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필요한 재정은 충당해야 하는데 그 필요를 채워 줄 만한 사람은 눈에 보이지만

어디까지 해도 되는지가 애매모호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겠지만 기다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결정을 하는 것을 주위에서 봅니다.


만약에 그런 재정의 문제가 임직에 영향을 주었다면

많은 경우, 후에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봅니다.

 

가끔 교회 안에 판공비(업무추진비) 성격의 돈 문제가 불거져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도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회사에서 CFO로 있을 적에 본사에 판공비 제도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만

보기 좋게 다 거절 됐지요. 회사 일로 필요하면

만나는 사람과 목적을 쓰면 경비를 줄 터인데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제안했지만 공연히 어려움만 당하고 단념했습니다.


지금은 한국도 판공비제도가 엄격히 규제되고 있으나

아직도 부정의 소지가 있어 완전 공개를 요구하고 있는 실태입니다.


극히 일부이지만 아직도 교회 안에 판공비 성격의 돈이 있고

또 일부 돈은 목사님 재량껏 선교나 기타 목적에 쓰라고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돈들은 다 사단의 올무가 됩니다.

 

돈을 제도 밖에서 Check and Balance 없이 쓴다는 것은

이미 사단의 올무에 한발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시간 문제지요.


그렇게 재량권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나

또 그것을 받아 쓰는 사람 모두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늘을 봐도 하나님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부끄럼이 없다고 말할지라도

곰곰이 자신을 돌아 보면 단돈 천원이라도 목적과 다른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점점 광의로 해석하기 시작해 자신이 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자신에게 계속 확인하는 우도 범합니다.


돈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만 틀린 것은 나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괜찮은 것이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돈에 대한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럴 기회를 가급적 줄이는 것이지요.


교회 안의 제도를 통해 또, 모든 것을 영수증 처리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며

자신을 묶을 때 사단의 올무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어느 조직이나 사회나 다 부정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말씀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 안에서 제도로,

또 기도로 투명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성도로서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면

세상보다 먼저 우리가 돈에 대해 투명해져야 합니다.


세상의 부정적인 관행을 교회에서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맛을 잃은 소금인 것이지요.


우리가 빛을 발하려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기업과 최소한도로 같거나 나아야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것은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솔선 수범하는 결단, 남이 다 하는데 내가 먼저 안 하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향하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유혹하고 있지요.


그 유혹을 이기려면 근신하고 깨어 있어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겸손히 말씀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겸손히 말씀 가운데 있을 때 자기 위주의 생각에서

또 주위의 부추김에서 점점 멀어지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되지요.


쓴 말을 해 주는 멘토가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가야 하는 힘든 길이지요.

가기 싫은 길이지요.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영광 되이 하는 길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길입니다.
 

 

- 김형회 -